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하더라도 입증 책임은 국가의 몫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 김인겸)는 15일 국가가 "국가정보원의 민간사찰 의혹을 제기해 명예가 훼손됐다"며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먼저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책임자이지 그 혜택을 누리는 주체가 아니며, 국민의 비판과 감시 대상"이라고 전제한 뒤 "국가는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가는 잘못된 보도에 대해 스스로 진상을 밝히거나 정정ㆍ반론 보도를 청구하는 등 대응수단을 갖고 있다"며 "만약 국가의 피해자 적격을 폭넓게 인정하게 되면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역할이 극도로 위축될 우려가 있고 소송이 남발될 위험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다만 "언론매체나 제보자의 행위가 명백한 허위사실 또는 정도를 벗어난 악의적 공격일 경우 국가도 예외적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으나, 국가가 이를 직접 증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피고가 다소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제보를 했다고 볼 수는 있을지언정 이를 악의적 행위 또는 정도에 벗어난 공격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내에서 유사 소송이 없어 해외 판례를 연구하기도 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극우주의자가 "독일 군대는 다 살인마들이다"라고 말해 국가가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를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는 판례가 한 건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미국과 영국 등 다른 국가에서는 관련 소송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재판을 맡은 김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은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을 제기할 주체로 보기 어렵고, 예외적으로 적용되더라도 국가가 입증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보다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박 이사는 지난해 9월 한 잡지 인터뷰에서 국정원의 민간사찰로 희망제작소가 하나은행과 추진하려던 사업이 무산됐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국정원은 박 이사의 발언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국가를 주체로 소송을 냈다.
국정원은 "서울고검과 협의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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