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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앞서 간 사람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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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앞서 간 사람들의 길

입력
2010.09.1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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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칠흑의 길을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바다를 닮은 호수를 품은 내륙 도시를 지난다

호반을 둘러싼 아름드리 오동나무

굽고 비틀리고 휘어진 굵은 가지 마디마디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지니

더디게 더디게 오는 여름 저녁놀 아래서

편지를 쓴다, 누군가 꼭 한 번 읽어줄

엉엉 울며 혹은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걸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그 슬픈 그늘에 대하여

상해 가흥 무한 남경 그리고 중경

한 발짝도 내다볼 수 없는

농무 자욱한 길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일기를 쓴 사람,

토굴에 웅크려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람,

다시 그날이 와도 숙명처럼

그 길을 묵묵히 갈 사람들에게

철 이른 들국화라도 만나면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담아 가만히 들꽃 소식과 함께

바람에 실어 보내리니

고맙다고

고마웠다고

그래서 나 오늘 다시 이 길을 간다고

무심히 여름 벌판을 적시는 강물에도 길이 있다고

길 너머 다시 길이 있다고

● 냇 킹 콜의 노래 중에 ‘Nature Boy’라는 게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슬픈 눈에 수줍음이 많았던 이 소년은, 그러나 현명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소년이 산과 바다를 건너 머나먼 곳을 여행한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보들을 만나고 또 왕들을 만났다고. 그러더니 말했죠. 우리가 배우게 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일이라고. 머나먼 곳에 갔는데, 거기에도 먼저 간 사람들이 만든 길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 때문이겠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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