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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3> 김대중 대통령과 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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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3> 김대중 대통령과 나 (2)

입력
2010.09.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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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통령과 내가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김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부터였다. 내가 한은 총재로 임명될 때 개인적으로는 처음 김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뒤 그 분이 퇴임할 때까지는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퇴임한 뒤 한은 총재직에 있었던 나는 이따금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내가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더욱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김 대통령의 철학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김대중평화센터가 설립되었는데 나는 여기 고문직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평화센터 회의에서도 그 분을 만나 의견을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80대의 고령이 믿기지 않게 지식에 대한 탐구욕과 국가 민족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김 대통령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김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여 사석이던 공석이던 내게 경제브리핑을 요청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 분은 마치 모범학생처럼 경청하고 비서진에게 정리해 보고하라고 하기도 했다. 왜 고용 없는 성장이 되는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왜 왔는가, 향후 신자유주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중국 경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통일시 남북 간의 경제통합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시장경제부문에 대해서는 시장론자로서 보수적인 편이고 공공재부문에 대해서는 공공이익을 앞세워 진보적인 입장인데 김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 분은 개방경쟁의 시장질서를 존중하고 자유무역협정을 적극 지지하였다. 대기업이라고 규제할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잘못하는 일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약분업에 대해서는 그 때 국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반대가 많았지만 백년대계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밀어붙였다고 회고했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업적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를 화해협력체제로 바꿔놓은 것, IMF 외환위기에서 경제를 살려낸 것, IT강국의 초석을 쌓아 놓은 것 등에 각별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김 대통령에게 주로 남북관계에 대해 묻고 많이 배웠다. 김 대통령은 북한의 폐쇄성과 호전성에 대해 그리고 신뢰와 국제 감각이 없는 처신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강한 쪽에서 포용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해야 하며 이에 대결로 대응한다면 재앙을 맞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을 쓰게 된 것인데 이 정책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져 개성공단의 건설, 금강산과 개성관광, 육로와 철도의 개통을 보게 되었고 휴전 이후 1997년까지 3,000명에 불과했던 남북 왕래인원 수가 그 후 10년 동안 44만 명에 이르고 남북이산 가족상봉의 길도 활짝 열어 놓았다고 설명했다.

평화센터의 모임은 주로 여의도의 중국음식점인 외백이나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렸다. 이 모임에서는 남북문제나 경제문제가 주로 논의되는데 남북문제는 임동원 장관이나 정세현 장관이 많이 발표를 하였고 경제문제는 내가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대통령은 매주 두 차례씩이나 신장 투석을 하는 중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경청하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우리 내외는 김 대통령 내외와 식사도 가끔 했는데 특히 양미옥이 잊히지 않는다. 김 대통령은 건강상 이유 때문에 매주 한 번 정도는 을지로 3가에 있는 양미옥의 양 구이를 드셨다. 양 구이를 들면서도 우리는 늘 나라를 걱정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이곳 탁승호 사장은 우리가 갈 때마다 두텁고 맛있는 양을 내놓았다. 2009년 6월 21일 우리 내외는 김 대통령 임동원 장관 박지원 의원 내외분들과 이곳에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그 뒤 곧 입원하셔서 그 날이 김 대통령에게는 마지막 양미옥 식사가 되었다.

2008년 9월에는 구리시의 한강변 코스모스 축제에 함께 간 일이 있다. 맑은 하늘 아래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는 1년도 못되어 85세를 일기로 타계하신 것이니 인생무상을 실감치 않을 수 없다.

김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징후를 느낀 것은 2009년 6월 11일 6.3빌딩에서 있은 6.15선언 9주년 기념행사 때였다. 그 때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오셔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임 대통령들이 합의해놓은 북한과의 6.15선언과 10.4선언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었다. 그 후 7월 13일 폐렴증세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시고 37일 만인 8월 18일 타계하셨다.

2009년 12월 9일에는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행사가 6.3빌딩에서 있었다. 나는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000여 명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가 되었는데 여기서 모금된 돈은 이희호 여사의 뜻에 따라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전달하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썬플라우어(해바라기) 상표의 종이 잔에 커피가 나왔다. 그런데 이희호 여사는 거기 그려있는 해바라기를 내게 보이며 ?때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은 햇볕정책을 상징하여 해바라기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서거 1주기를 맞아 김대중 자서전이 출간되어 2010년 8월 10일 홍은동의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여기서 서평을 맡은 나는 김 대통령과 같은 삶은 살아서 보다 죽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삶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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