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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그래도 고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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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그래도 고시는 안된다

입력
2010.09.1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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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치러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기자들이 수석 합격자 인터뷰하러 올 테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하고 허풍을 쳤다. 발표 당일, 아침부터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잠에 들어갔다. 꿈결에 "무현아! 무현아!"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그도 뒷말을 잇지 못했고, 아내는 내 무릎에 엎드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무리 신분 상승 사다리라지만

월간 에 게재되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시 합격기 중 일부다. 노 전 대통령이 75년 사시를 통과한 뒤 쓴 합격기 는 이 땅의 고시생들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명문으로 손꼽힌다. 비록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고졸 학력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그의 사시합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좌절과 방황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온몸으로 견뎌 온 그의 지난한 과정에 나름대로 감동으로 느끼고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합격기에서 노 전 대통령은 상고 졸업 후 회사에 취직했으나 월급이 너무 박했고 사회적 냉대에 반발해 고시공부를 결심한다. 하지만 워낙 빈농에다 책 살 돈마저 없어, 울산 한국비료 건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발판에서 떨어져 이빨이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합격했다.

그는 결혼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며 애태우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부터 하고 공부하라고 합격기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특히 시험 막바지에도 부부 관계는 금욕하지 않았다며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까지 소상하게 밝혀 역시 '노무현스럽다'는 평까지 받았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 채용을 계기로 공무원 채용방식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기존 행시 공무원의 절반 가량을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뽑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현대판 음서제라는 반발에 부딪혀 철회되고, 고시폐인을 양산하는 현 제도에 대한 개선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고시,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지난 60년 동안 고시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자리까지 가능케 한 합법적인 신분 상승의 사닥다리였다. 그러기에 수많은 처녀들이 고시생을 사칭하는 남자들에게 속아 순정을 바쳤으며, 돈도 빽도 없는 개천의 청년들이 용이 될 수 있는, 그래서 계층 이동을 꿈꿀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통과의례 역할을 해 왔다. 고시를 통해 등장한 엘리트 공무원들은 개발연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룩해낸 견인차였다. 이른바 압축성장의 화려함 뒤에는 그들이 흘린 피땀이 응축되어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공무원들이 앞장서 끌어가던 시대는 이제 역사가 되고 있고, 더 이상 관 주도의 일방적인 정책들이 먹혀 들지 않는다는 것은 90년대 말IMF 경제위기를 통해 체험했다. 고시 동기생들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그들만의 결속력은 비고시 출신과 외부 전문 영입인력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어 왔다.

능력이 중시되는 공무원 인사도 대개 기수, 서열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같은 관행도 고시에서 비롯된다. 오로지 고시 하나만을 위해 반 평짜리 쪽방에서 청춘을 불사르는 이른바 고시낭인의 삶은 어떠하며, 또 설사 합격한다 하더라도 긴 세월 억눌려 온 그들의 보상심리를 어느 누가 위무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반발한다고 개편안 백지화라니

신림동 고시촌이 끓어 오른다고 해서, 개편안을 덜컥 백지화하는 것은 볼썽 사납다. 특권층 자녀들의 채용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곧 고시 개혁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채용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획기적인 방안 찾기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우리에게 고등문관시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고시제도를 전수해준 일본조차 고시제도를 폐지한 마당에, 우리가 그대로 유지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고시제도는 안 된다.

김동률 KDI 연구위원·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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