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끝났다."
영국 BBC방송은 최근 자국민 1,000명 설문 결과 70%가 '은퇴 후 연금으로만 생계를 꾸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는 우울한 소식을 보도하며 이런 제목을 달았다. 각국별로 차이는 있지만 유럽의 공식 은퇴연령은 현재 대부분 60세 이상이다.
평균수명 연장으로 노동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생물학적 나이는 이보다 늘어났을 것으로 평가되지만, 신자유주의와 노동유연성 물결 속에 평생직장 개념이 쇠퇴하면서 정년을 채우는 근로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유럽 각국 정부는 정년연장을 추진하고 나섰다. 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에서 정년 연장은 세원 확대와 연금지출 축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처방이기 때문이다. 각국은 현재 단계적으로 연금 지급 개시연령을 2년 정도씩 늦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유럽 복지의 보루 프랑스의 반발
지난 7일 유럽 복지정책의 보루인 프랑스에서는 정년 연장안에 반대하는 200만명이 거리로 나와 '24시간 총파업'을 벌였다. 이들이 총파업에 나선 이유는 연금 때문이었다. 정년 연장은 곧 연금지급 개시연령이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 하원은 10일 현행 60세의 정년을 62세로 늦추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는 연금 전액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조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연금개혁법안은 상원 표결을 거쳐 내달 발효될 전망이다.
현재 프랑스의 법정 은퇴 연령은 현재 영국 이탈리아(남 65세ㆍ여 60세),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65세), 그리스(남 65세ㆍ여 62세) 등 유럽 주요국들 중 가장 낮다.
연금 더 붓고 수령시기는 늦춰져
그리스는 지난 5월 국가부도 위기 속에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과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3년간 1,1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엄격한 긴축을 약속했다. 정부는 2014년까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로 낮춰야 한다며 공공부문 근로자 대량해고와 퇴직연금 삭감을 우선 시행키로 했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는 평균 37년인 기존 연금 납부기간을 2015년까지 40년으로 확대하고, 연금수령 개시연령을 현 61.4세에서 63.5세로 높이기 위해 조기퇴직에 대한 불이익 조항을 넣은 연금개혁안을 추진, 의회에서 통과됐다. 조기 은퇴에 충분한 위험직종 분야 580개를 분류해 50세가 넘으면 전액연금을 지급하는 등 후한 정책을 펴왔다.
아테네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바시아 베레미(28세)씨는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가해 "나는 매일 염색약, 암모니아 같은 수백가지의 화학약품을 다룬다. 이런 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적당한 나이에 은퇴해야만 한다. 사람은 150세까지 살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뉴욕타임스에 불만을 쏟아놓았다.
들끓는 유럽국가 시위 도미노
이제 유럽은 과거보다 더 적은 연금을 받기 위해 더 오래 일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이에 맞서 유럽노동자총연맹이 29일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어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 도미노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제도 개혁안이 하원을 통과한 이후 프랑스 노조는 상원 표결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입장이다.
스페인 노조도 정부가 대대적인 노동시장 개혁을 천명하며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과 퇴직연금 삭감을 발표하자 29일 전 유럽 노조와 연대해 맞서겠다고 벼르고 있다. 영국 공공서비스연맹(PCS)을 필두로 한 영국 노조도 정부지출 25% 삭감의 일환으로 공공부문에서 60만개의 일자리 축소와 공공부문연금 대폭축소를 추진하는 정부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준비 중이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유럽 각국 상황
영국의 경우 연금 수령개시 연령이 2030년에는 72세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와 노후를 준비 중인 50대 장년층을 긴장시키고 있다. 영국의 싱크탱크가 발표한 내용인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추세로 봤을 때 다른 선진국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영국 연금정책연구소(PPI)에 따르면 1981년 영국민은 생애 중 평균 25%의 기간을 연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나면서 2000년에는 생애의 30%를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올해는 생애 33%로 연금 수령기간이 더 늘어난다. 연기금 운용이 지속가능했던 1981년 수준(25%)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2030년에는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72세로 올려야 한다고 PPI는 분석했다.
한발 양보해 30%로 맞추려고 해도 68세로 늦춰야 한다. 그나마 영국의 평균 연금생활 기간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 아니다. 2007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프랑스인의 경우 평균 27년 가량을 연금으로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영국은 평균 21년 가량이었다.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스웨덴의 국민들도 영국민보다 더 긴 기간을 연금으로 생활했다.
연기금 규모 증가가 기대수명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유럽각국은 연기금 부실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프랑스는 현재 연금적자가 420억유로에 이르는데, 연금수령개시 연령을 현재 65세에서 2년 늦추면 2018년까지 186억유로 정도를 메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년도 2년 늘어나면 소득세를 더 많이 걷을 수 있기 때문에 재정적자에 신음하고 있는 각국들은 1석2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국가마다 연금제도가 조금씩 다르지만 그리스 등은 연금펀드의 10%를 직접 국가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국민들의 연금수령액 축소를 강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연기금 문제를 재정측면으로만 접근해서 연금제도 개정과 정년연장을 추진하는 것은 사회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령자가 차별 받지 않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젊은 시절 당시 고령자들의 연금 부담을 완수한 세대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수명과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금잣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PPI는 "다양한 사회ㆍ경제적 그룹의 기대수명을 따로따로 평가하고 감안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진희 기자
■ 우리나라 '연금 수령시기 65세로 늦췄지만… 2060년엔 기금 소진 전망'
연금제도 개혁을 둘러싼 유럽 등 선진국 국민들의 거센 반발은 우리나라에서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현재 30대가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2043년부터 국민연금 적립금보다 지급액이 많아지기 시작해 갓 태어난 세대들이 연금을 받아야 할 2060년에 국민연금은 모두 소진된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결국 국민연금 가입자가 돈을 더 내거나, 수령자가 돈을 덜 받는 수 밖에 없다. 2007년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국 연금지급 개시 연령을 현재 만60세에서 2013년부터 61세로 늦추고, 이후 5년마다 1세씩 늦춰 2033년부터는 만65세부터 연금을 수령하는 미봉책으로 기금 소진연도를 2047년에서 2060년으로 조금 늦추는 데 그쳤다.
하지만 초저금리시대를 맞아 가입의무가 없는 부유층 자영업자들이 재테크 수단으로 국민연금에 임의 가입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등 여러가지 변수를 생각하면 연금고갈 시기는 더 앞당겨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공단 측은 "올해 7월말 적립금이 300조원을 돌파했으며, 운용수익 누적액도 123조6,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자금운용 성과가 크다"며 동시에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의 과반수를 가입자 대표로 구성하는 등 정부의 입김을 최소화해 만에 하나 정부 재정위기가 발생해도 국민연금이 손해를 입는 경우를 방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기수 기자 bless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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