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사회'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ㆍ중ㆍ소 기업 간'공정한 거래'가 그 첫걸음이다. 대기업이 납품 단가를 낮추고, 중소기업에서 공들여 개발한 특허나 기술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한다면 정말 '불공정한'사회다.
다행히 최근 산업계엔'공정 거래'의 맹아가 싹트고 있다. 약자에 대한 시혜적 의미였던'상생'을 넘어, 약자가 강자와 동등하게 병립하는'공정'개념에 대한 단초가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 또 정부의 강력한 구호와 의지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일각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대금결제, 기술협력, 거래과정 등에서 동등한 파트너십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속속 포착되고 있다. 급변하는 산업 현장을 찾아'공정한 사회'를 위한 경제계의 새로운 롤모델을 모색해 본다.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서로 한 몸이 돼 동반 성장의 하모니를 만들어 냈더니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10일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동의 부전전자. 허름한 빨간 벽돌 건물에 자리한 이 회사는 휴대폰용 스피커 부문에선 세계 정상급 중소기업이다. 그러나 15년전만 해도 주로 무선호출기(삐삐)에 들어가던 버저(buzzer)를 만들던 영세업체였다. 이 회사의 성장 비결에 대해서 이석순 사장은 '삼성전자와의 협업'을 꼽았다.
사실 처음엔 휴대폰에도 2,3개 음만 가능한 버저가 쓰였다. 그러나 삼성전자에서 다양한 벨소리를 내기 위해 화음이 가능한 스피커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 스피커를 납품한 것이 도약의 계기가 됐다. 이후 부전전자의 실적은 삼성전자 휴대폰 부문의 성장과 궤를 함께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2004년 삼성전자에서 엄지 손가락으로 밀어 올려 전화를 받는 슬라이드폰을 준비하자, 부전전자도 스피커 두께를 5㎜에서 3㎜까지 줄여야만 했다. 삼성전자는 부전전자의 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3차원(3D) 디자인 기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사출 노하우도 전수했다. 이러한 협업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얇은 휴대폰용 스피커가 탄생했다.
그런데 이번엔 품질에 문제가 생겼다. 두께가 얇아지자 울림통이 작아졌고, 이 때문에 저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또 스피커 자체만으로는 이상이 없는데도, 휴대폰에 조립되면 내부 구조 상 예상치 못했던 잡음이 들렸다.
이러한 숙제를 풀어준 것은 바로 삼성전자가 전수해 준 '6시그마' 기법이었다. 삼성전자에선 6개월간 직원을 파견, 6시그마 기법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6시그마 기법이 자리잡으면서 삼성전자와 부전전자의 공동 프로젝트의 난제들도 하나 둘씩 해결됐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부전전자가 이런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토대는 역시 빠른 대금 결제였다. 삼성전자는 1~15일 거래분에 대해서는 27일, 16~31일 거래분에 대해서는 다음달 12일 100% 현금으로 결제를 해 줬다. 통상 3개월, 길면 6개월까지도 걸리는 관행에 비추면 사실상 실시간 결제에 가깝다. 이에 따라 부전전자는 자금 걱정 대신 신제품 개발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단순히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주기 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며 "무조건 퍼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함께 성공을 이뤄냈다는 점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대ㆍ중ㆍ소 기업의 공정한 거래 문화 확립을 위한 가장 기본적 조건으로 신속한 대금 결제가 부각되면서, 삼성전자처럼 결제 기간을 대폭 줄이거나 현금 결제의 폭을 넓히려는 기업들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전력은 신기술이 적용된 물품이나 용역을 구매할 경우엔 아예 납품기업에게 선금을 주고 있다. 신기술 개발에 따른 자금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선금지급 비율도 더 확대했다. 이에 따라 1억원 미만 물품 계약의 경우 60%까지 선금 지급 비율이 커졌다. 납품해도 한참 후에 받던 대금을 미리 받는 것은 중소기업으로서는 획기적 선물이다. 한전은 이미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하반기(7∼12월) 5조2,000억원의 투자를 진행키로 한 바 있다.
STX의 구매조건부 신제품 개발 사업도 주목된다. 말 그대로 구매를 조건으로 중소기업이 수행하는 국산화 제품 개발 및 신기술 제품 개발에 따른 비용을 지원하는 것. 중소기업으로서는 신제품 개발 후 판로를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불활성기체발생기(IGG) 전문기업인 강림중공업은 STX의 구매조건부 신제품개발 사업 일환으로 2년간 3억원의 개발 비용을 지원받아 국내 최초로 대형 IGG 개발에 성공했다. STX조선은 강림중공업이 제작한 이 대형 IGG를 스페인 선주가 발주한 액화천연가스(LNG)선에 장착, 말 그대로 상생을 일궜다.
GS칼텍스도 최근 경영지원 선급금 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자재구매 또는 용역계약 시 거래 대금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사가 직접 지급하는 것. 이를 위해 이미 책정한 자금도 1,400억원이나 된다.
심지어 불공정 하도급 관행이 만연된 건설업체들도 변화하고 있다. 대림산업의 하도급 대금 현금 결제 비율은 무려 85%나 된다. 올해는 단기 운용자금이 필요한 협력업체에 무보증ㆍ무이자 운영자금 100억원을 마련, 지원하고 있다.
안산=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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