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엘리트들의 적나라한 거짓말과 부도덕을 목도하면서 국민은 더욱 무더운 여름을 지내야 했다. 그 무더위 끝자락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양동마을을 다녀왔다. 나라와 법치에 대한 신뢰가 고갈되고 있는 터에 관가정(觀稼亭) 사랑채 한 켠에 서있는 배롱나무에는 붉은 꽃이 흠뻑 매달려 있었다.
양동마을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씨족 마을이다. 사돈 관계인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가문이 500년 거주해온 마을로 큰 규모의 양반 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손씨, 이씨 집안에서 과거 급제자가 116명에 이르렀고,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이언적을 배출한 곳이다. 얼마 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객이 갑자기 늘어났는데, 양반마을의 기품을 잃지 않을까 하는 후손들의 걱정도 있는 모양이다.
무욕과 청백리의 상징
마을에는 학문과 도덕을 중시한 유학자들의 고결한 성품이 배어있는 듯 했다. 마을 입구 오른편에 있는 문필봉 쪽으로 올라가면 심수정(心水亭)과 강학당이 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심수정은 형인 이언적을 대신해 노모를 봉양한 이언괄을 추모하여 건립한 정자다. 문필봉 기슭에 있는 강학당은 이씨 문중의, 안락정은 손씨 문중의 서당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고 높은 곳에 서당을 배치하여 자손들에게 가기 힘든 길을 체험하도록 교육했다.
관가정은 양동마을 왼편 서향받이 언덕 위에 있다. 이 집은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던 손중돈이 살았던 곳이다. 대문과 야트막한 담장 너머 형산강과 경주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관가정이라는 집 이름은 곡식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인데, 자손들을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자부심이 엿보인다.
집은 영남 유학자들의 사상체계를 반영한 듯 사각형의 폐쇄구조를 띠고 있다. 사각형의 정면 가운데 중문이 있고 중문 왼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누마루로 꾸민 2칸 사랑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랑채 대청과 온돌방에 앉은 이들 눈높이에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것이 배롱나무다.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배롱나무 꽃은 한번 피기 시작하면 꽃다발 아래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오래도록 핀다.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백일 동안 꽃이 핀다. 이 꽃이 지면 가을이 온다. 그래서인지 배롱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마당의 나무 한 그루에서도 철학적 의미를 찾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채찍으로 삼았다. 붉은 꽃을 보면서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선비들에게는 몸가짐을 돌아보는 수신목 역할이 컸다. 배롱나무 꽃은 끈질기다. 한번 바람에 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새 꽃이 돋아난다. 그 줄기는 나무껍질 없이 뼈를 드러낸 채로 있다. 불가에서 배롱나무는 무욕의 상징이었으나 유학자들은 청백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염치 알았던 조선 중기 선비들
양동마을 선비들은 읍성과 거리를 둔 곳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조선 중기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향촌사회에도 세력을 확보했지만, 읍성과는 거리를 두어 힘의 충돌을 막으려는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인근의 경주 최부자 가문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 만 석 이상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대대로 실천했다. 조선 중기의 엘리트들은 염치를 알았고, 그래서 마당에 배롱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배롱나무 꽃을 보며 도학의 길을 다짐하던 엘리트 기풍이 사그라들면서 조선은 쇠퇴했다. 대한민국이 사상 최대의 부를 쌓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제 자식만 챙기는 광기에 사로잡힌 나라, 권력이 염치를 압도한 나라, 젊은이들을 절망시켜 두 개의 국민을 만드는 나라, 그 앞에는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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