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독자적인 고유의 도량형을 사용해왔다. 이를테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고 할 때 쓰는 '줌'이나 '한 짐 지고 간다' 고 할 때의 '짐' 등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고유의 단위이다.
우리가 아는 '한 줌'은 한 손 안에 움켜 쥘 수 있는 정도의 양으로 '한 웅큼' 이나 '한 주먹'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원래 '한 줌'은 가로 1 자 세로 1 자에 해당하는 넓이를 가리키는 단위였다. 도량형을 일제히 정비한 조선 초기 세종대왕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 자의 길이가 지금의 약 39 cm에 해당하므로 '한 줌'은 약 0.15 m2에 해당하는 넓이이다.
또'한 짐'은 흔히 힘센 장정이 등에 짊어지면 움직이기가 버거울 정도의 양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이 역시 100 줌, 즉 약 15 m2에 해당하는 넓이의 단위였다. 1 단은 10 줌이고 1 짐은 100 줌, 즉 10 단이며 1 먹은 10,000 줌에 해당하는 넓이를 표시하는 단위였다.
이렇게 원래 넓이를 나타내던 단위가 부피의 단위로 바뀌게 된 것은 농경시대에는 단순히 땅의 면적 자체 보다는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나오는 농작물의 수확량이 더 중요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국가가 농지에 대해 세금을 매기거나 개인이 서로 땅을 사고 팔 때, 그저 땅의 넓이보다는 그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이에 따라'한 줌'넓이의 농경지에서 나온 곡식의 양이 '한 줌'으로, 그리고 '한 짐'넓이의 땅에서 수확하는 곡식의 양이 '한 짐'으로 점차 바뀌어 사용되었다고 알려진다.
이에 비해 얼마 전까지 농촌에서 많이 사용하던 '마지기'는 1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을 말하는 것이다.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피를 기준으로 넓이를 환산해 사용한 예이다. 논인지 밭인지에 따라, 혹은 그 땅이 비옥한지 여부에 따라 '한 마지기'의 실제 면적은 4 배까지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농작물 수확량이나 노동량으로 가늠하는 가치성을 비교하기에 적합한 단위였기에 최근까지도 많이 사용되었다.
농경 시대에서 산업 시대로 들어서면서, 도량형 단위는 미터법으로 통일되었다. 미터법에서 땅 1 m2는 세계 어디서나 같은 면적을 말한다. 하지만 같은 면적의 땅이 갖는 경제가치의 편차는 농경시대보다 훨씬 더 커졌다. 농경 시대에서는 땅의 경제 가치는 넓이나 자연 조건에 의해 결정 되었지만, 오늘날 땅의 가치는 산업시대에 적합한 물적 인적 자원 흐름의 편의성을 좌우하는 교통 환경이나 주거 환경 등에 의해 정해지며, 나아가 국토 개발 여부에 따라 인위적으로 창출되고 변화한다.
산업 시대를 지나 정보통신 시대, 지식기반 사회로 옮겨 간 미래의 땅의 가치는 어떤 기준에 따라 정해질까? 지리적 국토의 면적 보다는 우리가 창출하는 지식 영토의 면적이 더 중요해지고,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삶의 질에 대한 가치가 더 소중하게 고려되는 시기를 예상해 본다면, 앞으로 지식 영토의 가치가 어떤 기준에서 정해질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맞춰 우리의 지식 영토를 어떻게 넓히고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일이다.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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