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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1) 중간평가 반대한 김대중 총재의 협박성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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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1) 중간평가 반대한 김대중 총재의 협박성 주장

입력
2010.09.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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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수 석방투쟁을 마무리 짓고 집에 갔더니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984년 말 수배생활을 끝내고 새로 집을 구할 무렵 전태일 동지 어머니의 권유로 구입한 9평짜리 무허가 집이 재개발로 29평짜리 맨션아파트가 돼 있었다. 죽은 전태일이 나의 경제적 무능이 안쓰러워 살 집을 갖게 한 것 같았다. 마침 잠잘 데가 마땅찮은 석방자들이 매일 10여명씩 우리 집에 와서 자곤 했다.

석방되고서 보름 넘게 장기수 석방투쟁에 매달리다 보니 재야원로들과 구속돼 있던 동안 도움을 준 분들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일에 휘말렸다. 우선 87년 대선 때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인한 국민의 신망 상실과 내부 분열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결성에 관여해야 했다.

나는 본래 6월 민주항쟁 이후에는 운동권이 비합법적인 전선조직과는 별개로 합법적인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보아 전민련 결성에 소극적이었으나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이미 운동권이 합의해 둔 데다 나에게 사무처장을 맡겨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광주ㆍ5공 문제에도 관여해야 했다.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설치돼 활동하고 있었으나 광주ㆍ5공문제의 주된 책임자인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문책은 외면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어 운동권이 적극 나서야만 했다.

무엇보다 노태우 후보의 선거 공약인 중간평가가 이루어져야 했는데도 노태우 정권은 물론이고 야당조차 흐지부지 넘기려 해 이에 대한 대처가 시급했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그나마 긍정적이었으나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적극 반대하고 있었다.

아무튼 87년 대통령선거 패배로 한때 좌절의 순간을 맞긴 했으나 이미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루어낸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야당이 패배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어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열기는 더없이 뜨거웠다. 다만 이 열기를 수렴해서 민주화를 이루어낼 정치세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전민련이 결성됐다. 전민련은 반외세자주화와 반독재민주화, 그리고 민중생존권보장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노태우 정권의 퇴진이 중요한 목표였다. 전민련 의장단에는 이부영과 이창복(재야) 이영순(노동) 김상덕(농민) 배종렬(지역) 오충일(종교)이 선임됐는데, 이것은 민중운동역량의 성장과 전선조직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나, 강력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정치조직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전민련은 5공청산과 민중생존권 보장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운동의 발전에 질곡이 되기도 했다. 운동역량이 이 정도로 성장했고 또 민주화가 이 정도 진척됐으면 이제 합법적인 정당활동을 통해 집권대체세력으로서의 권능을 확립해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전민련은 출범 다음날인 1월 22일 서울 대학로에서 ‘노태우 정권의 민중운동탄압 및 폭력테러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2만여명이 참여해 민중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이 집회는 현대그룹의 노동조합간부 집단폭행사건을 규탄한 집회이기도 했지만 민주화를 외면한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집회여서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바라는 국민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중운동권은 당연히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 정권을 퇴진시키려 했다. 설사 중간평가에서 지더라도 중간평가를 실시해야 노태우 정권이 중간평가에서의 승리를 위해 민주화 조치를 단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민련은 이부영 의장과 김근태 정책실장, 그리고 사무처장인 나를 김대중 총재에게 보내 중간평가를 수용토록 설득하기로 했다. 우리 세 사람은 김 총재를 찾아가 설득했으나 그의 반대는 완강했다. “중간평가를 해서 노태우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 주식투자자가 700만명이 넘는데 이들이 정치적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우보수세력이 중간평가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재야민주세력을 초토화할 것이어서 중간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가당찮은 주장이었다. 중간평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도 가당치 않았지만 극우보수세력이 중간평가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민주세력을 초토화할 것이란 주장은 민주세력에 대한 협박이었다.

김 총재는 민주화의 주요 고비마다 이런 협박성 주장을 내놓았다. 80년 ‘서울의 봄’, 87년 6월 민주항쟁, 그리고 6ㆍ29선언 후 등 걸핏하면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며 군부강경파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선 민주세력이 자제해야 한다는 거였다. 투쟁하지 않고는 군사독재정권을 물리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민주화 운동에 대한 협박이자 군사독재정권을 고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최대 범죄인 광주학살문제에서도 김대중 총재는 주된 책임자인 전두환과 노쩔痢?감싸기에 바빴다. 이를 두고 그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거라고 해명했으나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 들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처벌한 건 정치보복일까?

무엇보다 그는 민주화의 결정적 시기였던 87년 대선 때 지역감정의 결정판인 ‘4자 필승론’을 내세워 후보단일화를 거부해 민주화를 무산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민주화 운동이 권력욕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예로서 역사적 죄과가 될 것이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그를 민주주의의 화신인 양 추앙하는 기념행사가 많이 열렸다. 호남차별의 극복에 크게 기여한 대통령 당선, 분단 55년만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민족적 영예인 노벨 평화상 수상은 높이 기릴 만하다.

그러나 민주화에 역행한 중대한 역사적 과오와 대통령 재임 중에 벌어진 온갖 실정과 부패 등은 무시한 채 오직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민주주의의 화신인 양 추앙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국민을 모독하는 일이어서 역사의 엄정한 문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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