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박씨 부부. 남편은 대기업 과장이고 부인은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다. 어느 날 박 과장은 기쁜 소식을 접한다. 회사에서 350만원의 깜짝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보너스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도 큰 기대는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나온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다. 그 동안 가족끼리 제대로 해외여행 한번 못 갔던 것이 생각난 박 과장은 그 돈으로 동남아 관광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박씨 부부는 1년 전부터 매달 30만원씩 정기적금을 붓고 있다. 자녀 교육비에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으면서 월 30만원 저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여러 번 해지할 생각도 했었지만 유혹을 참으면서 악착같이 모아서 오늘 드디어 만기가 되었다. 당신이 박 과장이라면 이 돈으로 동남아 여행을 가겠는가?
돈마다 꼬리표가 따로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박과장이 만기가 된 적금으로 동남아 여행을 갈 것 같지는 않다. 그 돈을 원래부터 동남아 여행비용으로 생각하고 모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은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에 쓰거나, 아니면 다시 다른 곳에 투자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적금으로 탄 돈은 최소 360만원 이상일 테니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은 350만원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런데 씀씀이는 상대적으로 더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은 돈이라도 뜻하지 않게 보너스로 받은 돈과 열심히 저축해 얻은 돈은 그 성격이 다르다는 데서 이처럼 다른 반응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금액이 비슷하다고 그 돈들이 똑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보너스로 받은 돈은 우연히 생긴 돈이니 편하게 써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렵게 모은 돈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하기 힘들다.
행동재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박씨 부부처럼 돈을 구분해서 생각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의 회계장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돈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돈에는 꼬리표가 없지만 사람들은 보너스로 받은 돈과 저축해서 만든 돈, 이런 식으로 별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분산투자
마음의 회계장부는 투자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가장 흔한 사례는 분산투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행 예금에 8,000만원, 주식형 펀드에 2,000만원을 투자 중인 홍길동씨의 사례를 보자. 홍씨는 최근 1년간 예금에서 400만원을 남겼지만, 주식형 펀드에서는 200만원 손실을 봤다. 전체적인 투자 성과는 200만원 수익이지만 이때 홍씨는 마음의 회계장부 때문에 각각의 투자성과를 따로 평가하기 쉽다.
여러 자산에 나눠 놓는 포트폴리오 투자를 한다고 여기면서도 수익률에 대한 평가는 전체 포트폴리오가 아닌 개별 자산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포트폴리오 투자를 했다고 생각한다.
포트폴리오 투자를 할 때 주식에 일정부분 투자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마음의 회계장부 탓에 사람들은 주식형 펀드에 일정 정도 자산 배분을 해놓고서도 이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투자처를 옮기거나 자주 사고파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해외투자와 심리회계
투자자들이 마음의 회계장부 때문에 실수하기 쉬운 또 하나의 문제는 해외 주식형 펀드로의 분산투자이다. 투자결정을 할 때는 자신의 모든 자산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투자자들은 대체로 좁은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한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투자자가 은퇴에 대비해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일부 자산을 개인연금 등 노후대비 절세금융상품에 투자하고 남은 자산은 다른 대상에 투자할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자산배분이 국내 주식형 펀드에 50%, 해외 주식형 펀드에 50%를 투자하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아마 많은 투자자는 절세금융상품인 개인연금 등에 위와 같은 비율로 투자하고 이외의 자금에 대해서도 같은 비율로 투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적의 자산배분이 아니다. 개인연금 같은 절세상품이 아니라면 해외 주식형 펀드 비과세 혜택(풀어읽는 키워드 참조)이 폐지되면서 매년 수익에 대한 세금을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선택은 개인연금 등 절세상품으로 해외 주식형 펀드를 투자하고 그 외의 자산으로 국내 주식형 펀드를 매입하는 것이다. 전체 포트폴리오는 여전히 50%의 국내 주식형 펀드와 50%의 해외 주식형 펀드로 구성되지만, 매년 세금을 덜 내게 된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이렇게 자산을 배분하기 어렵다. 마음의 회계장부 때문에 노후대비 절세상품과 일반 투자상품을 별도의 돈으로 구분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총이익에 집중하라
마음의 회계장부는 매우 흔한 현상이며 거의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특히 포트폴리오 투자를 할 때 마음의 회계장부는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악영향을 피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총이익’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포트폴리오 투자를 하는 이유는 뭔가. 장기적으로 위험을 줄이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것이다. 어떤 투자자가 안전한 수익만을 생각한다면 포트폴리오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예금에만 투자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어떤가. 저금리 상황은 지속되고, 물가는 올라가고 있다. 예금에만 투자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물가상승률도 따라잡기 어려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주식 또는 주식형 펀드를 추가하는 이유가 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회계장부에 사로잡혀서 투자를 평가하게 되면 앞서 말한 홍길동씨의 경우처럼 시장상황에 부화뇌동하여 주식형 펀드를 자주 매매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홍길동씨는 예금에서 안정적인 수익이 계속 발생한다. 이자율이 연 5%라고 생각해보면 8,000만원을 복리로 투자한 홍길동씨의 자산은 5년 뒤 약 1억210만원 정도가 된다. 2,210만원의 이익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주식형 펀드에 2,000만원을 투자한 것이 5년 뒤 반토막이 난다고 가정해도 포트폴리오 전체의 수익은 1,210만원이 된다. 적어도 원금 이상의 이익은 나는 것이다.
만약 주식형 펀드에 투자한 2,000만원에서 5년 뒤 50%의 수익이 발생됐다면 어떨까. 포트폴리오 전체 수익은 3,210만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올 9월1일 기준으로 설정액 1,000억원 이상인 국내 주식형 펀드들의 지난 5년간 수익률 평균이 약 84%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5년간 50%의 수익은 전혀 무리한 수치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5년이라는 시간은 주식형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수익률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홍길동씨가 마음의 회계장부에 빠져있다면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이 급변하는 것을 참기가 힘들 것이다. 그 결과 충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포트폴리오를 장기적인 총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식형 펀드의 변덕스런 수익률은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예금에서 발생되는 이자로 원금은 지킬 수 있고, 주식시장이 좋으면 추가 수익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5년을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해외펀드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 김철수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총이익의 관점에서 포트폴리오를 바라본다면 답은 나와있다. 해외 주식형 펀드 투자는 개인연금, 퇴직연금, 변액연금 등의 절세 혹은 비과세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국내 주식형 펀드는 일반 펀드를 활용해도 상관이 없다. 노후대비 절세상품과 일반 금융상품을 마음 속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적인 총이익이 더 많이 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윤치선 수석연구원
▦풀어읽는 키워드
해외 주식형 펀드 비과세 혜택이란
2007년 6월부터 2009년 12월말까지 국내에서 설정한 해외 주식형 펀드에서 발생한 해외주식 양도차익에 대해 한시적으로 세금을 면제해줬던 제도를 말한다. 지금은 이 제도가 폐지됐다. 현재 국내 주식에 투자한 주식형 펀드의 경우 주식 양도차익으로 100만원 수익이 발생하면 비과세 혜택이 적용돼 100% 수익을 모두 가질 수 있는 반면, 해외 주식형 펀드의 경우 100만원의 차익이 발생하면 이중 15만4,000원(15.4%)은 세금으로 내야 한다.
■ '마음의 회계장부' 역활용법
'마음의 회계장부'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투자자들에게 이로운 심리과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현명하게 사용한다는 조건 하에서 그렇다.
당신이 결혼할 때 부모님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거북이를 선물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금거북이는 부모님이 결혼할 때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물려 내려온 집안의 보물인 셈. 당신이라면 금값이 올랐다고 금거북이를 쉽게 처분해 사용할 수 있겠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물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감히 처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의미가 담긴 돈은 더 잘 지켜진다. 이 원리를 잘 활용하면 노후준비처럼 어떤 목적을 가진 자금을 마련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노후자금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은퇴하는 시점은 과거보다 더 빨라지는데 평균수명은 점점 더 길어지므로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은퇴는 먼 미래의 일로 느껴지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기 힘들다. 이럴 때 마음의 회계장부를 꺼내보자. 그리고 장부에 '노후준비 자금'이라는 항목을 기입해보자. 가장 쉬운 실천방법은 변액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의 노후대비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그 상품으로 투자되는 돈은 노후준비 자금이라는 의미가 붙게 되고, 그 때문에라도 쉽게 손을 대기가 어렵다.
마음의 회계장부를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은퇴 후 자산관리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은퇴 전까지의 자산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은퇴 이후의 자산관리이다. 은퇴 이후에는 근로소득이 없어지거나 현격하게 줄어들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자산관리에 실패하면 은퇴 이후 30년의 삶이 힘들어진다.
노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관리 원칙은 무엇일까. 바로 '절약'이다. 은퇴 이후의 수입은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결국 자신의 힘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출인 것이다.
지출관리에 있어서도 마음의 회계장부를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방법은 말 그대로 회계장부 또는 가계부를 쓰는 것이다. '어차피 꼭 쓸 것만 쓰는데 가계부를 적는다고 특별히 더 절약이 되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가계부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데도 사용되지만, 예산을 세우는 것 자체가 소비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일단 사용처가 정해진 돈은 심리적 장벽에 부딪혀 다른 항목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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