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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영화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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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영화는 책이 아니다

입력
2010.09.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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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 이야기이다. 나는 그의 작품 와 , 그리고 최근작 의 음악을 작곡하면서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거기에는 영화를 떠나 문화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깊이 생각할 화제가 있다.

1999년 개봉한 는 폭발적 흥행 기록을 세웠다. 대다수 제작자가 등을 돌렸던 영화의 성공은 이변이었다. 줄거리가 거의 없는 영화의 대박흥행은 드라마에 익숙한 한국 관객의 영화에 대한 감성이 변화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가 오랜 뉴욕 생활에서 돌아와 만든 는 대규모 제작비에 비해 흥행 성적은 초라했다. 오랜 칩거를 통해 영화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깊어진 것일까?

는 더욱 줄거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영상에 집착했다. 속으로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영화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그의 철학은 완고했다. 일반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지만'형사 폐인'이라는 열혈 지지자 집단을 탄생시켰다. 가까이서 그들의 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종교적 수준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열 번씩이나 보고 또 보는 열광은 도대체 어떤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례적인 것은 가 소수만 즐길 수 있는 '작가 영화'가 아니라 흥행에 실패한 상업영화라는 점이다. 더욱이 의 광팬들은 작가 영화를 고집하는 영화광들이 아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의 역사적ㆍ 문화적 진실이 있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 정신의 시대적 변형은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는 내용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의 변화에 달렸다는 통찰을 한다. 문자를 쓰고 책을 읽는 일이 전부였던 사람들의 정신은 영상 전자통신 등 새로운 미디어로 소통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신의 변형은 주고 받는 이야기에 달린 게 아니라 미디어 자체의 변화에 달렸다. 춘향전을 책으로, 판소리로, 영화로 보는 일은 다 같은 스토리라도 다른 경험을 하는 일이다.

스토리텔링은 주로 활자를 통한 소통에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문자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정신에서 논리적 일관성과 개연성은 소통에 절대적 요소이지만 음악과 미술, 움직임이 있는 영화는 문학적 요소가 아니라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책이 아니다. 영화는 자신이 문자와 어떻게 다른 매체인지 입증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소통 방식으로 새로운 정신과 감각을 추구한다.

의 성공은 한국 사람들의 정신과 감각이 활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의 끝에서 줄거리로부터 자유로운 영상을 향한 찬사는 활자의 지배에서 풀려나 변화한 정신의 확인이다. 지성적 공허함을 이유로 냉대 받은 에 대한 찬사는 문자와 탈문자가 공존하는 우리 시대의 분열된 정신을 반영한다.

미디어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는 일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이고 인간 정신의 운명이다. 지혜는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거울 같은 언어로 반사시켜 개념과 행동의 불일치를 벗어나는 자기고백이다. 영화에 줄거리가 없어서, 심오한 주제가 없어서 지성적 공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책과 활자에 대한 미련이다.

나는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를 기다린다. 화려한 색채와 기교로 가득 찬 영상의 배후에는 줄거리로부터 자유로운 백색 공간의 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성우 영화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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