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람과 희망] <12>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람과 희망] <12>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장

입력
2010.09.09 17:35
0 0

■ "1mm 공간에 붓으로 금선 10개… 고려사경 섬세함에 외국인도 탄성"

붓 끝에 금가루를 묻히고 가는 선을 조심스럽게 그어 내려가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을 죽인다. 금가루를 다시 묻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이 생소하면서도 정교한 한국 예술에 빠져든 듯 얕은 탄성을 지른다.

8월 21일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김경호(48) 한국사경연구회장이 한국의 전통 사경을 시연한 자리다. 김경호 회장은 LACMA 측이 8월 1일 한국사경전시회를 시작하면서 정우택, 최응천 두 동국대 교수와 함께 초청해 그곳에 갔다. 그는 이날 미국 박물관과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을 비롯해 한국학 및 동양학 연구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은 고려의 대표 문화"라며 "한국의 목판인쇄술과 금속활자의 연원도 바로 사경"이라는 내용의 특강을 한 뒤 곧바로 사경을 시연했다.

다음날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시아미술관 관계자와 만났다. 그는 김경호 회장에게 한국, 중국, 일본의 사경을 전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김경호 회장은 이에 세계 주요 종교 사경을 같이 선보이자는 뜻에서 한국의 불교 사경, 유럽의 성경 사경, 이슬람의 코란 사경을 함께 전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중국, 미국 등지에서 자신의 사경을 전시한 적이 있는 김경호 회장이지만 이번 미국 행은 특히 각별했다. 비록 소수의 전문가이기는 하나, 한국 사경의 제작법 등을 미국인 앞에서 직접 보임으로써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모았고, 이것이 앞으로 한국의 사경을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일이 다 내 뜻대로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 사경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깃든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독학으로 이룬 고려 사경 복원

사경은 종교 경전을 금, 은, 묵으로 옮겨 쓰는 행위 혹은 그렇게 한 경문을 말한다. 우리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이후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한국 사경은 곧 불교 사경이 된다. 한국 사경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공인된 뒤 사찰에 불교경전을 보급하고 승려를 교육하기 위해 처음 이뤄졌다. 사경이 절정에 이른 것은 고려시대. 사경원이라는 국가 기관이 따로 설치됐고 사회적으로는 공덕과 불심을 키우는 간절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시대 중에서도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는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다. 원나라에 사경 전문가 100여명을 수 차례 파견한 것도 이 시기다. 사경이 위기에 빠진 것은 조선이 유교국가를 표방하고 출범하면서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세종의 형 효령대군과,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이 사경을 할 만큼 어느 정도는 유지가 됐다. 하지만 중기 이후 유학자들이 불교를 결사 반대하면서 사경의 맥도 사실상 끊어지고 만다. 그렇게 잊혀진 사경은 일제시대를 지나 해방을 맞고도 좀체 관심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1970년대 신라백지묵서대방광화엄경, 보살선계경 등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학계의 연구가 본격화할 무렵, 개인 차원에서 사경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김경호 회장이다. 그는 사경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소장자에게 달려가 보여달라고 매달렸다. 소장자가 그 귀중한 유물을 쉽게 보여줄 리 없었고 그럴수록 그는 읍소를 하거나 큰 소리를 치면서 더 적극적으로 달라 붙었다.

처음에는 매정하게 굴던 소장자들도 몇 번씩 찾아와 보여달라고 떼를 쓰는 그 앞에서 손을 들었고 그는 어렵게 열람한 사경에서 금줄의 빛깔과 광도 심지어 아교 농도까지 꼼꼼히 살피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사경 제작과 관련한 옛 문헌이 거의 없어 어려움이 많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있는 기록을 참조해 직접 사경을 한 뒤 고려시대의 사경과 비교하며 기술을 습득했다. 그렇게 해가며 고려사경 기법을 되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경 작품을 완성해 전시회를 여는 한편 등 관련 서적을 내고 대학 등에서 관련 강의를 하면서 지난 20여 년간 사경을 세상에 알렸다.

물론 옛 그림이나 옛 글에 비해 아직은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사경이 이나마 존재를 드러낸 데는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 한국 사경 하면 곧바로 그를 떠올릴 정도가 됐으며 학계 등에서도 그의 사경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경호 회장이 사경을 시작한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거론하자면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점을 들 수 있다. 부모님이 모두 불교를 믿었고 친척 가운데 스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불교와 가깝게 지냈다. 청소년기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했고 죽음을 넘어선 삶을 찾고자 불교에 더더욱 빠져들었다. 고교 시절에는 부모 몰래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도망쳐 행자생활을 하는 등 세 번이나 집을 뛰쳐나갔다가 붙잡혀왔다. 그만큼 불교와 인연이 있었던 그는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불교 경전을 묵으로 옮겨 썼으니 초보적인 사경은 그때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전북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군대를 마치고 1990년 서실을 열어 서예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사경에 뛰어들었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한 그는 청소년기에 여러 서예 대회에서 상을 수상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외국 사경 요소 도입해 새로운 사경 만들고파

그는 지금까지 수백 점의 사경을 했지만 모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공력을 들였다고 자부하는 것은 '일불일자화엄경약찬게' '일불일자법화경약찬게' 등 여덟 점에 불과하다. 이들 작품은 두문불출한 상태에서 꼬박 6개월 이상 작업해 완성한 것이다.

사실 사경은 고행이다. 오직 사경 하나에 집중해야 하며 다른 것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사경을 할 때는 집, 사무실만 오가며 사람도 만나지 않고 자극이 될만한 조건은 철저히 피한다. 그렇게 한 덕분에 그는 1㎜ 공간에 붓으로 10개까지 금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함을 갖게 됐다.

돋보기를 이용하지 않고도 그 정도의 섬세한 작업을 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을 갖춰야 한다. 책상 위의 티끌을 붓으로 정확하게 찍은 뒤 3분에서 5분 정도 손이 흔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주로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작업을 시작해 새벽에야 마친다.

금 가루를 묻힐 접착제의 접착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34도 전후의 온도와 70도 이상의 습도가 필요한데 거기에 맞춰 밤샘 작업을 하면 진이 빠진다.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바람에 현재 아래 어금니는 성한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즐거운 고행이다.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속세의 일을 다 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 그가 고민하는 것은 새로운 기법이다. 이제까지는 고려 사경을 복원하는데 주력했지만 앞으로는 자신만의 사경을 창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위해 주목하는 것이 성경 사경과 코란 사경이다. 성경 사경은 서양의 수도사들이 잉크를 펜으로 찍어서 한 것으로 글 주변에 문양과 그림이 있고 채색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슬람 권에서 이뤄진 코란 사경은 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연필처럼 만든 뒤 잉크를 찍어서 하는데 역시 문양과 그림을 넣고 색을 칠한다.

반면 한국 사경은, 본문이 그림 없이 글자로만 채워져 있고 채색도 사실상 없다. 그는 현재 동영상을 보고 코란 사경법을 개념적으로는 어느 정도 익힌 상태다. LACMA 시연이 끝난 뒤 펜과 채색 잉크를 구입해 가져온 것은 성경 사경을 연습하기 위해서다.

김경호 회장이 만들려는 새로운 기법은 고려사경 기법에 알파벳과 이슬람문자 등의 요소를 첨가하는 것이다. 그는 "금강경, 법화경 등을 새 방식에 따라 사경할 계획"이라며 "그렇게 되면 유럽인, 미국인, 아랍인 등이 한국 불교 사경에서 자기네 사경 요소를 발견하고 더 친근감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새로운 기법은 한국 사경을 세계에 알리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