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의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분명한 것은 구약과 신약 성서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그리고 로마에 식민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한 모세와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에 대한 믿음과 상관 없이 인류 문화의 거대한 축이 되었다. 2,000여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영향을 끼쳤던 성서는, 때로 억압의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자유와 구원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숙고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분당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순례단과 함께 성서의 역사가 담긴 이집트와 이스라엘 땅을 찾았다. 답사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생명의 숨결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희뿌연 모래 바람, 검붉은 화강암의 산악, 이글거리는 태양빛뿐. 모세가 이집트 노예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간 곳은 삭막한 시나이 반도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곳에서 그들이 대면해야 했던 것은 쓰라린 고독과 타는 목마름이었으리라.
지난 3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발한 버스가 1시간 3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아프리카 대륙과 시나이 반도를 가르는 수에즈 운하의 시작점.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 일행이 홍해를 건넌 지점으로 전해지는 이곳에선 총을 든 이집트 군인들 외에 물살을 볼 수는 없었다. 군사요충지인 까닭에 둑을 높이 쌓았고, 일반인은 운하 밑 터널로 지나가야 했다.
시나이 반도로 넘어와 홍해를 끼고 남쪽으로 달리자 휑한 모래 사막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작렬하는 대낮의 열기는 버스 안마저 후끈거리게 할 정도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이집트 노예 생활이 더 나았다”고 투덜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된다는 말이 일행 사이에서 절로 나왔다.
남쪽으로 더 내려오자 모래 사막은 험악한 산악 지대로 변했다. 역시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불모의 돌산들이었다. 성서 속 르비딤으로 추정되는 오아시스 지역인 와디 파이란을 거쳐 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지금은 수에즈 터널에서 차로 6시간여 걸리는 이 거리를 이스라엘인들은 석 달을 걸어야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나선 모세는 지름길을 두고 왜 이리 험하디 험한 곳으로 그들을 데려 왔을까. 당시 이집트와 가나안의 직선 거리는 중요 교역로다 보니 이집트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서 돌았을 거라는 게 역사가들의 얘기다. 하지만 홍해도 가르는 모세의 권능을 생각하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이튿날 새벽 2시. 시나이 산 초입엔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이 모여 모세의 길을 따라 오를 참이었다. 얼핏 봐도 400~500명은 족히 돼 보였다. 손전등에 의지해 등반에 나선 일행이 군데군데 휴게소에서 숨을 돌리며 오른 지 3시간여. 마침내 해발 2,285m 정상에서 일출을 맞았다. 그 빛과 함께 어둠에 가렸던 시나이 산 주변의 풍광도 드러났다. 뭇 생명은 자취를 감췄고 피를 토하듯 검붉은 암석들만 굽이치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모세는 홀로 이곳에 올라 40일간 머물렀다. 새에덴교회 이종민 목사는 “성령이 충만한 곳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와 보니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모세가 감내했을 외로움과 고난, 인내가 절실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모세가 이곳에서 신탁을 받아 이스라엘인들에게 전한 십계명의 내용은 압축하면 크게 두 가지. 유일신앙과 ‘살인하지 마라’ 등의 공동체 규범이었다. 다신적 자연숭배, 즉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 젖어있던 당시의 종교 관념에 일대 획을 긋는 보편적 유일신앙의 출발점이며 그에 근거한 공동체 윤리규범, 말하자면 정의라는 관념의 구축이었다. 십계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레위기’ ‘신명기’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잣대와 함께 과부, 고아, 이방인 등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동정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젖과 꿀’이라는 달콤한 자유에 앞서 사적 이해를 넘어선 공정한 잣대와 함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연숭배를 통한 기복 신앙으로는 나올 수 없었고, 대신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게 하는 고난의 여정이 필요했으리라. 십계명이 자연의 형상이 말라버린 고독한 산에서, 그것도 억압받는 유랑의 민족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머리를 짓누를 문제로 다가왔다.
시나이= 글ㆍ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성경 근거… 출애굽 시기는?
모세와 출애굽의 역사성을 규명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흔히 모세가 쓴 것으로 전하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대해 학계는 유대 민족이 여러 전승되어온 텍스트를 취합해 기원전 6~7세기에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모세 이야기를 신화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수천년 전에 일어난 일을 부정할 근거도 없다.
성서를 근거로 출애굽의 시기를 추산할 경우 기원전 15세기설과 13세기설이 맞서 있다. ‘열왕기’에는 솔로몬 치세 네번째 해(BC 967년)가 출애굽 후 480년이 지난 때라고 나오는데, 역산하면 BC 1447년 무렵이 된다. 하지만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비돔과 라암셋이 람세스 2세(BC 1279~1213)때인 13세기에 건축된 도시라는 점에서 출애굽에 등장하는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95년 이집트 룩소르 계곡에서 발굴된 람세스 2세의 가족 무덤에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장남의 미라도 발굴됐다. 모세가 당시 파라오에게 마지막으로 내린 재앙은 장남의 죽음이었다. 모세의 출애굽 루트 역시 전승되어온 것인데, 모세가 중간에 거친 마라의 샘, 르비딤 등은 당연히 모세가 출애굽 중도에 쉬었을 법한 시나이 반도의 오아시스다.
시나이 산은 성서에 나오는 ‘불타는 떨기나무’란 표현 때문에 현재의 시나이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의 부름을 받을 때 신이 불타는 떨기나무로 나타났다고 기록됐는데, 시나이 반도에서 유일하게 떨기나무가 발견된 곳이 바로 현재의 시나이 산 아래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도사들이 이곳 주위에 하나 둘 몰려들었고,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헬레나 왕비는 기원후 330년에 이곳에 수도원을 짓도록 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0년에 증축된 성 캐더린 수도원은 지금도 시나이 산 초입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떨기나무도 순례객들을 맞고 있다.
시나이 반도=송용창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