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가을이다. 태풍이 몰아치는가 하면 여전히 한낮의 폭양이 기승을 부려도, 분명 가을이 왔다. 유독 뜨거웠던 여름을 보낸 뒤, 2010년의 가을은 높고 푸른 하늘보다 먼저 바다로 다가왔다. 집게발을 곧추세운 가을꽃게가 꿈틀대기 시작했고, 목포 앞바다는 먹갈치의 은빛 춤사위로 눈이 부시다. 깨보다 고소하다는 전어는 떼를 지어 화려한 군무를 추어대며 가을을 반긴다. 서해안은 지금 황홀한 맛의 향연, 가을의 바다가 시작됐다.
꽃게에게도 가을은 남자의 계절- 전북 부안 격포
격포 앞바다를 칠산바다라 부른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물 반 고기 반의 기름진 어장이다. 지금 격포를 분주하게 만드는 어종은 바로 꽃게다. 격포는 인천의 연평도, 태안의 안흥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꽃게의 집산지다.
꽃게는 제철이 봄과 가을 두 번이다. 봄엔 암게가, 가을엔 수게가 제철이다. 방금 잡아온 꽃게를 선별하는 어부에게 가을엔 암게를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을엔 수게만 잡힌다”고 했다. 희한하게도 봄철 그물에 걸리는 꽃게의 90%는 암게고, 가을의 그물에는 또 대부분 수게만 걸려든단다. 다른 물고기와 달리 유독 꽃게만 남녀유별이 심한 이유가 무엇이냐 또 물었더니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건 꽃게에 물어보시죠.”
인근 식당에서 꽃게로 만든 맛난 꽃게장과 꽃게찜, 꽃게탕을 맛보면서도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국립수산과학원에 연락을 넣었다. 그곳에서 ‘꽃게박사’로 꼽히는 연인자 연구관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연 연구관은 “꽃게가 영리하기 때문”이라고 첫마디를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꽃게는 다른 어종과 달리 겨울잠을 자는데 그 겨울잠을 자기 전 가을에 수정이 이뤄진다. 먼 바다 깊은 곳에서 겨울잠을 자고 난 뒤 봄이 되면 암게들은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찾아온다. 다른 어종은 산란을 위해 암컷과 수컷이 함께 다니며 암컷이 알을 낳아놓으면 수컷이 정자를 흩뿌리는 방식인데 꽃게는 다르다. 이미 수정을 한 상태라 굳이 수컷이 필요 없어 암게들만 몰려온다. 둘 다 들어오면 산란공간도 부족하니 귀찮은 남편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 그래서 봄에는 알이 꽉 찬 암게들만 잡힌다. 산란기 이후 가을이 오면 수정을 위해 수게들이 모여든다. 꽃게들은 또 겨울잠을 자기 전 껍질을 벗는 탈피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수게는 여름에 먼저 껍질을 벗어 이미 다시 껍질이 두꺼워진 상태고, 암게는 이제 탈피를 했기에 껍질이 흐물흐물하다. 탈피를 하는 동안 암게들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수정하려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수게들이 그물에 걸려들어 가을엔 수게들만 잡히는 것이다.
이제서야 꽃게 남녀유별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그제서야 꽃게의 황홀한 향과 맛이 제대로 입안에 살아났다.
수게는 암게보다 싸다. 봄의 암게가 1kg 당 3만원 대까지 올라갔다면 수게는 1kg에 1만원 꼴이다. 알 없이 살만 꼭꼭 찬 수게가 싸면서도 오히려 먹을 게 많다는 평이다.
부안에서 꽃게요리로 유명한 곳은 격포에 있는 이어도횟집(063-582-4444)이다. 꽃게찜도 좋고 꽃게탕도 좋지만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꽃게장이다. 주인 오흥석씨는 전국의 어느 게장하고도 겨룰 자신이 있다고 했다. 짜지 않으면서 입안에 침을 흥건하게 쏟게 만드는 게장의 비법에 대해 그는 간장에 더해지는 육수라고 했다. 그 육수에는 30여 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단다. 꽃게장 6만~10만원, 꽃게찜 4만원, 꽃게탕 4만원.
검은 뻘을 이마에 새긴 먹갈치-전남 목포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갈치는 크게 은갈치와 먹갈치로 나뉜다. 제주의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게 은갈치고, 목포 인근 뻘바다에서 잡히는 게 먹갈치다. 먹갈치라고 해서 전체가 까만 갈치는 아니다. 등지느러미쪽에 먹구름이 끼듯 검은빛이 비칠 뿐 다른 몸통 부위엔 갈치 특유의 은빛 분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먹갈치는 은갈치에 비해 몸집은 조금 작은 편이다. 대신 살에 지방이 풍부하다. 제주 은갈치가 육질에 탄력이 있다면 목포 먹갈치는 부드럽고 고소하다. 수입산 갈치와도 맛에 차이가 있다. 수입산은 뼈가 억세고 살도 퍼석퍼석한 반면 목포 먹갈치는 그냥 씹어 먹어도 좋을 만큼 뼈가 여리고, 살에도 수분이 충분하다.
신안 인근에서 잡히는 먹갈치 대부분은 목포로 모인다. 목포여객선터미널 인근의 목포수협위판장이 모든 먹갈치가 모여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경매가 진행된 후 중매인을 통해 인근 매장이나 시장으로 넘어간다.
목포 먹갈치는 8월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곽순임씨는 “고구마순이 나올 때 갈치가 나오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목포의 먹갈치찜에는 묵은지와 함께 고구마줄기를 같이 넣고 끓여낸다.
추석이 지나고 10월이 오면 목포시에서 이어지는 영산강하구둑에는 갈치잡이 낚시꾼들로 장관을 이룬다. 캄캄한 밤에 저마다 낚시대를 드리우고 달빛보다 눈부신 갈치를 낚아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부터 10여년 전부터 그곳에 갈치들이 몰려들었단다. 영산강하구둑이 지어지고 난 뒤다. 이제 막 산란을 한 어린 갈치들이다. 큰 바다로 나가기 전 영산강하구둑 인근의 파도 없는 평온한 바다에서 성장을 하는 것들이다. 먹갈치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목포의 바다에서 지나간다.
목포에서 갈치요리로 이름난 곳으로 옥암동의 신선식당(061-272-8211)을 추천 받았다. 인근 남악신도시 전남도청 근무자들은 물론 목포의 식도락가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갈치구이, 갈치찜 1인분에 1만2,000원이다. 이외에 초원식당(061-243-2234), 선경횟집(061-242-5653), 갈치명가(061-284-1177), 선미식당(061-242-0254), 찜식당(061-245-0037) 등이 잘한다고 소문나 있다.
전어는 한때 생선도 아니었다? - 충남 서천 홍원ㆍ마량항
전어가 전국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예전엔 생선취급도 받지 못했던 게 전어다. 지금의 전어가 제대로 대접받게 된 데에는 축제라는 마케팅이 있었고, 이 축제를 만든 한 공무원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현재 배재대 관광마케팅 사업단장을 하는 신화용씨가 충남도 관광홍보계장으로 있을 때다. 그는 1999년도 우연히 서천의 홍원항으로 출장을 가게 됐다. 당시 홍원항 이장과 서천군청 관광과장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으로 생선을 수족관 가득 실은 차들이 계속 지나갔다. 뭘 싣고 가느냐 했더니 전어란다. 어디로 가는 차냐고 했더니 부산 경남으로 가는 차란다. 여기 사람 안 먹으니 거기서 사간다고. 가격이 얼마냐 했더니 생물인데 kg당 4,000원도 안 하더라는 것이다.
서천이 고향이었던 그는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흔해도 너무 싼 거 아닌가. 그러면 이거 비싸게 팔아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안 사가고 안 먹어서 그런 거라면 잘 사가게 잘 먹게 만들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전어축제였다. 그 자리에서 책임지고 사람을 모아올 테니 축제를 열라고 권유했다. 그리곤 서울의 신문사들을 쫓아다니며 전어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전어가 도대체 뭔가 궁금해 홍원항을 찾았고,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됐다. 마침내 축제가 열리자 홍원항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었다. 항구까지 들어가는데 3, 4시간이 걸렸고, 오후엔 모든 횟집의 물고기들이 씨가 말랐다. 축제라고는 달랑 공터에 텐트 몇 동 쳐놓았을 뿐이었다. 1,300만원 들여서 63억원의 소득을 내 무려 4,000배가 넘는 효과를 거뒀다.
국내 최초의 전어축제가 성공하자 이젠 전국 곳곳에서 전어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건진 전어로는 수요를 감당 못하자 전어 양식장까지 등장했다. 전어로서는 극적인 신분상승이다.
예전에 전어는 천대받던 물고기다. 일부러 잡으러 다니지도 않았다. 다른 고기 잡으려다 그물에 걸리면 먹을까 말까 고민했고, 손님들에게 공짜로 한 바가지씩 퍼주던 물고기다. 축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전어에‘바다의 깨소금’ ‘가을 전어 대가리에는 깨가 서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은유가 결합되자 전어의 인기는 더욱 폭발했다.
전어축제의 시작점인 홍원항과 인근 마량항의 횟집에서는 전어를 쉽게 맛볼 수 있다. 전어축제를 담당하는 서면개발위원장 정정호씨는 “홍원, 마량항에서는 절대 양식을 쓰지 않는다”고 호언했다. “잡히는 게 남아도는데 양식이 왜 필요하느냐”는 게 그 이유다. 홍원항 인근 횟집에선 전어를 이용한 3종 세트를 맛볼 수 있다. 회와 무침, 구이다. 요즘 시세는 1kg당 3만원씩이다. 회는 ‘뼈꼬시’라 불리는데 비늘과 내장만을 제거한 뒤 뼈째로 썰어 고추나 마늘을 얹어 쌈장과 함께 상추에 싸먹는다. 깻잎, 양배추, 미나리, 배, 당근, 오이 등을 잘게 썰고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 내놓는 전어무침은 매콤달콤한 맛이 일품. 전어 요리의 지존은 역시 구이다. 노릿하게 구워낸 구이는 맨손으로 잡고 뜯어먹어야 제 맛이다. 큰 뼈를 제외하고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버릴 게 없다.
부안ㆍ목포ㆍ서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서해안 3味 식후경 적벽강 음악분수 동백정 '눈이 배부르네!'
맛난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면 이젠 눈이 즐거울 차례다. 화려한 맛 못지 않는 황홀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올 여름 물줄기를 뿜기 시작한 초대형 음악분수에, 가슴 저리도록 짙게 타오르는 동백정의 낙조, 고결한 흰빛으로 피어나는 위도상사화 등이 기다리고 있다. 서해의 가을 3미(味)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풍경들이다.
위도상사화와 적벽강의 수성당
격포가 있는 부안은 천혜의 경승지다. 수려한 산자락도 모자라 바다까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땅이다. 격포에 꽃게가 몰려들 때 격포 앞바다의 위도엔 상사화가 피어난다. 다른 지역의 상사화는 붉은 꽃봉오리인데 비해 위도의 상사화만큼은 하얗다. 학술명도 위도상사화다. 다른 상사화는 군락을 지어 피어야 제 맛이지만 위도상사화는 단 한송이 만으로도 쉽게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내뿜는다. 섬에선 위도상사화를 ‘몸몰잇대’라 부른다.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를 받는 꽃이다.
격포에서 가까운 적벽강도 놓치기 아깝다. 파도가 깎아낸 붉은 해안단층의 절벽으로 채석강과는 다른 분위기로 훨씬 장대하다. 적벽강 언덕 위에는 수성당이란 당집이 있다. 바로 앞 칠산바다의 여신인 개양할미를 모시는 곳이다. 부안 사람들은 “변산의 기운이 한 곳에 응집돼 그 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300여 무당들이 모여 큰 굿이 펼쳐진다. 전국의 내로라는 무당은 다 모인다고 한다.
새만금방조제와 연결되는 지점에 부안이 숨겨놓고 있는 비경이 있다. 변산온천을 지나 부안댐으로 가다 보면 벼락폭포를 만난다. 비가 온 다음에만 폭포 물줄기가 연출되는 곳이다. 댐 밑으로 흐르는 직소천 너머 병풍를 두른 듯 늘어선 기암절벽의 한 가운데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물이 없어 폭포가 보이지 않더라도 후회는 없다. 기암과 어우러진 물가의 정한 풍경이 마음을 훔쳐간다. 꽃과 수풀, 기암이 맑고 정한 물 위에 제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는다.
목포의 초대형 음악분수와 갓바위
먹갈치 꿈틀대는 목포는 유서 깊은 항구이자 예향이다. 목포하면 떠오르는 상징 3가지를 꼽으라면 유달산과 삼학도, 갓바위를 들 수 있겠다. 갓바위는 목포의 수호신마냥 바다로 툭 불거져 나온 바위다. 삿갓을 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다. 큰 바위는 8m정도, 작은 바위는 6m 정도의 키다. 파도가 깎아내 만든 기묘한 형상이다. 전에는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야 볼 수 있었는데 2008년 해상보행교가 설치돼 이제는 걸어서 갓바위의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밤에는 보행교에서 조명이 뿜어져 나와 갓바위의 색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목포의 하당 신도시 평화광장 앞바다엔 올 여름 새로운 명물이 탄생했다. 길이 150m되는 초대형 음악분수다. 270여 개의 노즐에서 나온 물줄기가 30~70m 높이로 솟구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350여 개의 조명에 맞춰 춤을 추어댄다. 하루 4번(주말엔 6번) 저녁때 물을 뿜는다. 목포시청 관계자는 “전국에 음악분수는 많지만 바닷물을 쏘아대는 바다 음악분수는 목포가 유일하다”고 했다.
동백정의 낙조와 빨갛게 익은 동백열매
전어로 배를 채웠으면 인근 동백정으로 유람을 떠날 시간이다. 화력발전소 옆으로 동백정에 오르는 산책로가 놓여있다. 천연기념물 제 169호로 지정된 500년 넘은 고목들이다. 이곳의 동백은 3, 4월 정염의 빨간 꽃을 피운다. 지금은 자두만한 크기의 빨간 동백 열매가 맺혔다. 열매는 돌멩이만큼이나 단단하다.
바닷가에 우뚝 서있던 동백정은 아쉽게도 지금 해체 보수 중이다. 동백정 옆에는 당집이 있다. 마량리 주민들이 풍어제 겸 당제를 지내는 곳이다. 정월 초이틀에 시작해 이틀간 당제가 진행된다. 570여 년 지켜온 유서 깊은 전통이다.
동백정에 올라섰을 때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동백정의 낙조를 기다렸다. 바로 앞 오력도를 배경으로 예쁜 구름을 이고 있는 수평선 너머로 햇덩이가 떨어졌다. 붉은 물감이 하늘과 바다로 번졌고, 동백정 동백나무의 붉은 열매도 더욱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목포ㆍ부안ㆍ서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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