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백이다. 나이도 그렇지만, 머리 얘기다. 말이 반백이지, '서리 맞은 초가지붕'처럼 백발에 가깝다. 그래서 사진도 5,6년 전의 것을 계속 쓴다. 다분히 유전적인 이유겠지만, 흔히 하는 말 "나쁜 머리 무리하게 쓰면 센다"에도 부분 동의한다. 머리가 희면 좋은 경우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의 빈 자리 어디에 앉아도, 나이와 상관없이 눈치 볼 일이 적다. 얼른 눈에 띄어 좋고, 사람들의 인상에 강하게 박힌다. 가끔은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기 좋다는 공치사도 듣는다. 그러나 그보다는 '노인'취급을 받아 언짢은 일이 훨씬 많다.
■ 오전 느지막이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늘 만나는 사람이 있다. 중절모를 쓴 70대 노인이다. 그는 먼저 객차 안을 한 번 둘러본 다음 통로를 걸으면서 명함 만한 전단을 나눠준다. 자신이 미리 점 찍은 승객에게만 그것도 살짝, 잽싸게 주고 지나가 미리 거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고개 숙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읽고 있는 책 위에 던져 놓는다. 뭔가 싶어 보니 '경로우대 50% 할인권'이다. 파워맨을 만들어주는 약과 기구를 노인에게 싸게 판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까 창피하기도 하고, "나에게?"라는 생각에 화가 치민다. 흰 머리 탓이다.
■ 역시 지하철에서다. 80대로 보이는 할머니 세 분이 탔다. 빈 자리가 없다. 알다시피 요즘 젊은이들에게 자리 양보란 없다. 이어폰 끼고 졸거나, 딴청을 부린다. 뻔뻔하게 쳐다보고도 그대로 앉아 있다. 일어나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 그냥 "고맙다"고 하며 앉으면 될 텐데 미안해서인지 한마디 한다. "괜찮아요. 나보다 나이도 별로 안 적은데."아들 같은 사람에게 이 무슨 착각인가. 얼른 "저 나이 안 많아요"라고 했지만 얼굴은 홍당무가 됐다. 그제야 옆에 있던 젊은이도 허연 머리를 보고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 "염색 안 하세요?"라는 말을 수백 번은 들었다. 그들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반문한다. 인사차 신문사에 들른 청와대 한 고위공직자는 "흰색으로 염색을 하셨네요"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한 선배는 엘리베이터에서 뒷모습을 보고"피기도 전에 시들었네"라고 놀렸다. 염색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귀찮고, 있는 그대로 살고 싶어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스트레스와 오해, 조롱으로 염색하기를 강권하고 있다. 흰머리를 숨기려 열에 아홉은 염색을 한다. 염색제 시장규모가 무려 2,000억원에 달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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