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 해도,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해보았다고 말하겠어요. 그러니 후회는 없지요. 인생에서 추구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기대한 것 이상일 겁니다.”
11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내 지중해 레스토랑인 마르코 폴로에서 칠레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내한한 필라 로드리게즈(48) 셰프는 39세까지 잘 나가는 패션 마케팅 디렉터였다.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패션업체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1년까지 미국 캐주얼 브랜드 토미 힐피거의 중남미지역 마케팅 이사였다. 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23개국을 도맡아 토미 힐피거 매장을 열었고, 1년 중 10개월은 호텔과 비행기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파리로 떠났다. 요리를 배웠고, 다시는 패션업체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어요. 마케터로서 할 만한 일은 다 했고 다음 단계는 아마 영업총괄이사 정도였겠죠. 아니면 폴로나 랄프 로렌같은 다른 브랜드로 옮길 수도 있었을 거고요. 하지만 그래 봤자 비슷한 일을 하게 될 터였죠. 그게 아니라 전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좀 쉬다가 경영학석사(MBA)를 하기로 했죠.”
MBA가 시작되기까지는 9개월 정도가 남아있었다. MBA 과정은 죽어라 공부만 해야 하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터였다. 그런데 오빠 중 한 명이 색다른 제안을 했다. “네 얼굴을 좀 봐라. 얼마나 지쳤는지. 일단 파리 같은 데 가서 그림이나 요리 같은, 좀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 재충전해.” 단순한 생각으로 로드리게즈 셰프는 유서 깊은 프랑스 요리학원인 르 코르동 블루에 들어갔고, 2년을 파리에 머물렀다. 1년은 르 코르동 블루의 학생으로, 1년은 파리 레스토랑의 요리사로.
“MBA 안 한 걸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투자 측면에서 봐도 르 코르동 블루와 MBA에 드는 비용은 비슷했어요. MBA를 나왔다 하더라도 결국 숫자 상대하는 일이나 했겠죠. 하지만 칠레에서 요리는 더 큰 기회가 있거든요.”
칠레에서 음식산업은 광업 다음으로 규모가 큰 분야다. 칠레로 돌아온 뒤 그는 레스토랑은 열지 않기로 했다. 한 브랜드를 세계적으로 확장해 온 마케터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칠레 요리를 프로모션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여겼다. ‘필라 로드리게즈 푸드 & 와인 스튜디오’를 연 로드리게즈 셰프는 칠레 정부나 육우협회, 와인 업체 등과 함께 칠레의 식자재와 요리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와인과 잘 어울리는 요리를 짝지우는 것이 그의 전문분야다. 그는 칠레 잡지 가 선정한 칠레 최고의 주방장으로 뽑히기도 했고, 칠레 최고의 요리비평가 마리아나 마르티네즈로부터 “(로드리게즈 셰프가 사는) 콜차구아를 세상에 선보인 주방장”이라고 격찬을 받았다.
그가 전업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이유가 비단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전망만은 아니다. 요리는 그가 패션제품을 팔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주었다. 몇 주 전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스러운 일을 경험했다. “누군가 트위터에 ‘카르미네어(Carmenere)’라는 와인에 대해 묻는 질문을 올렸어요. 그러자 어떤 미국인이 ‘2년 전 워싱턴DC에서 열린 한 이벤트에서 고기 요리와 어울린 이 와인을 먹었었는데, 그 때의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하는 거에요. 바로 제가 선보인 칠레 음식과 와인의 매칭 행사였거든요. 그 때의 고기 요리는 지금 마르코 폴로에서 선보이는 메뉴이고요.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와인과 함께 대접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다니, 대단하지 않아요? 정말 요리는 신의 선물인 거죠.”
그는 요리를 하는 것과 T셔츠를 파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나의 모든 것이 브랜드 이미지에 속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요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거죠.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이고요. 전세계 사람들과 칠레의 맛과 요리기술, 칠레의 문화를 널리 공유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요. 지금 내 일은 한 기업이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죠.”
앞으로 로드리게즈 셰프는 칠레 아이들의 식생활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어한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칠레의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팔리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그 나라 아이들은 뭘 먹고 있는지 아세요?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케첩 같은 거죠. 전세계적으로 아이들의 식습관이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걱정스러워요.” 그가 생각하는 대안은 지역마다 어머니들의 손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전통 조리법이다. 그는 “칠레에는 각 지역마다 내세울 만한 전통 조리법이 있어요. 아시아인들이 전통 요리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잃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을 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 "지구촌 누비며 음식 맛 본 것이 입맛을 개발하는 자극제 돼"
필라 로드리게즈 셰프는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이 요리사로서 자질을 키우는 데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패션 마케터로서 업무상 수많은 나라를 다닌 것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이 늘 여행을 즐겨왔는데, 이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는 다른 피부 색깔, 다른 문화, 다른 생활습관을 존중하게 됐는데 요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가령 김치가 좋으냐 나쁘냐를 말할 수는 없다. 독특한 다른 맛인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쌀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이 있는데 로그리게즈 셰프는 “밥이나 쌀로 빚은 술뿐만 아니라 쌀가루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와 쌀과자 등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다양한 음식의 맛을 경험하는 것은 입맛을 개발하는 자극제가 된다. 그는 “하드 디스크에 많은 정보를 집어넣듯이 여행하면서 음식을 맛보면 다양한 나라의 맛과 향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러면 잘 어울리는 요리와 와인을 찾거나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요리사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타고나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저 요리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열정을 갖고 사랑해야 해요. 주방을, 음식을, 맛을 사랑해야 하죠. 솔직히 말하면 신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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