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태안읍 화산리 용주사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인 경기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국보 제 120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것이 바로 용주사 동종이다. 이 종은 용주사 대웅전 우측에 있는 천불전의 우측 범종각에 잘 보관되어 있으며 높이 1.45m, 무게 1.5톤에 달하는 대종이다.
이 종은 지금까지 고려 초기에 주조된 종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용주사 강대련(姜大蓮)주지가 종의 몸통에 용주사의 내력과 아울러 종을 주조한 시기를 새겨 놓았다. 그 내용을 보면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5월에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이고 그 때 이 종을 주조했다”는 것이다. 또 누가 새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명문이 종 몸통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갈양사 스님 반야(般惹)가 2만 5,000근을 모아 만들었는데 만든 시기가 금상(今上) 16년 9월”이라 했다. 이 두 명문으로 통일신라 때인 854년 염거화상이 갈양사를 창건한 것은 분명하지만 종을 만든 연대는 불확실하게 됐다. 후에 새겨놓은 명문의 금상(今上)이란 문자는 통일신라시대 사용된 문자가 아닌 조선시대 임금이 재위하고 있는, 말하자면 지금 임금이 16년째 왕으로 재위하고 있는 때를 말하는 것이어서 명문의 내용이 의심스럽다. 종의 형태와 새겨진 문양 등의 특징을 보면 신라 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아무래도 고려 초에 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용주사의 연혁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갈양사로 창건되었지만 고려에 들어와 4대 광종 21년(970년)에 고려왕조의 원찰로 승격시켜 번창했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으로 갈양사가 병화를 입어 법등이 끊어져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정조가 왕위에 올라 양주 비봉산에 모셔져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지금의 융건릉)으로 옮기고 아울러 명복을 빌기 위해 갈양사 터에 용주사를 창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용주사 종각에 보존돼 있는 용주사 동종은 전문가의 주장대로 고려초기에 주조된 것이라 해도 용주사 동종은 아니다. 오히려 갈양사 동종이라 해야 맞는 명칭이 될 것이다. 다행히 몽고 병란에 절의 건물은 화재로 불타 없어졌지만 이 종만은 온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것이다. 갈양사가 고려에 들어와 고려왕조의 원찰로 승격되어 번창하면서 사격에 맞는 범종을 마련했을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종의 제작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 만든 지금의 종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지금의 용주사 동종은 분명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모든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고려 종이라기 보다는 신라 종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할 것이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새겨 넣은 명문이긴 하지만 염거화상이 854년 갈양사를 창건한 때가 그 해 5월이고 이 종은 다시 그 해 9월에 마련된 통일신라시대 종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단순히 형태에 따른 양식의 변천에 의해 시대를 추정하는 것보다는 비록 후대에 새긴 명문이라 해도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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