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위기 돌파력은 놀랍다.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순발력이 탁월한 것 같다. 도덕 불감증을 여실히 드러낸 개각으로 위기를 자초하더니, 자신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와 두 명의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면서 ‘공정한 사회’의 깃발을 내세웠다. 현역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가결과 성희롱 발언 의원 제명도 공정사회론에 휩쓸려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 딸 특채 문제에 대해서도 하루 만에 유 장관을 가차없이 내치는, 전례 없이 신속한 행보로 여론의 비판을 무디게 만들었다. 여기에도 ‘공정사회’ 푯말이 내걸렸다.
8ㆍ15 경축사에서 처음 제시된 ‘공정한 사회’ 의제가 금세 정권 후반기의 국정기조로 자리 잡았다. 야당의 공세와 여론의 비판에 궁지에 몰렸던 집권 세력은 이 새로운 의제를 내세워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이 대통령은 그 동안 몇 차례의 위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순발력을 보여줬다. 집권 초 강부자 내각, 부자 감세, 친기업을 표방하면서 우향우 행진을 이어가더니, 촛불정국 이후 지지도가 바닥으로 추락하자 중도실용과 친서민으로 문패를 바꿔 달아 인기를 만회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 발 더 나가 공정한 사회의 기치를 내걸었다.
순발력이 좋다는 것은 국민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의 바람직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을 잃은 변신은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오랜 삶의 체험과 성찰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생각과 주장은 금방 변질되거나 겉치레에 그치기 십상이다.
왜 이 시점에서 갑자기 ‘공정한 사회’일까. 혹시 최근 불어 닥친 열풍에서 힌트를 얻은 건 아닐까. 다시 말해, 정의에 목말라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경위가 어떻든 접어두자. 비록 그것이 포퓰리즘의 발로라 하더라도 국정 최고 책임자가 내건 기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그것이 여권의 족쇄가 되든, 기득권 세력의 굴레가 되든, 그 파장과 영향에 관심을 갖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주창한 ‘공정한 사회’의 실체가 아직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8ㆍ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라고 정의했다.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고, 승자가 독식하지 않으며, 노사가 협력해 발전하고,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상생하고,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라고도 했다. 하나 같이 좋은 말이지만, 구체성이 없어 공허하다. 이 대통령은 시장경제를 위한 규제개혁, 사교육비 절감을 포함한 교육개혁, 든든학자금, 보금자리 주택, 미소금융과 햇살론 등을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거론했지만, 그것들이 공정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 효과는 또 어떤지 의문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공정사회 기조가 현재 예고되는 것처럼 기득권층의 비리와 특권, 반칙에 대한 사정(司正) 차원이라면, 큰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힘 있는 이들의 반칙과 특권 못지 않게, 오히려 그보다 더, 규칙 자체가 불공정한 탓이 크다. 용산참사가 드러낸 도심 재개발지역 상가 세입자 문제는 그 중 한 예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분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굽은 잣대를 펴지 않은 채 그것을 엄격히 들이댄다고 해서 공정한 사회라 말할 순 없다.
김상철 사회부장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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