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 신분과 계층을 넘어선 사랑이 초호화 여객선 침몰의 극한 상황과 어울려 대중에 어필했다. 그 감동적 사랑 이야기를 잇는 코드는 신분적 차별과 사회의 공정성(fairness)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과 같은 3등 선실의 하층민은 통로가 봉쇄되는 바람에 쉽게 탈출하지 못한다. 반면 1등 선실의 상류층은 선원들을 꼬드기고 윽박질러 부녀자와 어린이 우선인 구명보트에 오른다. 막된 언행으로 멸시 받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 구원(久遠)의 사랑으로 기억된다.
특권계급의 탐욕과 위선
1912년 대서양에서 침몰한 영국 여객선 타이타닉은 실제 상류계층의 벌거벗은 탐욕과 이기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당시 승객의 3분의 1이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1등 승객은 60%가 생존했다. 특히 남자 1등 승객의 생존율이 높았다. 이 때문에 상류층을 위해 3등 승객들의 탈출을 막았다는 의혹과 함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되뇌는 상류계층의 위선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논란이 지금껏 이어지는 연유를 어느 논객은 이렇게 설명했다. "공정한 사회, 공정한 기회(fair chance)는 인간 본성에 내장된 요구이다. 삶이 힘든 때일 수록 더욱 그렇다."
외교 장관의 딸 특채 스캔들이 총리 인사청문회의 파란을 압도했다. 인터넷 댓글에 비친 여론은 험악했다. 현대판 음서(蔭敍)니 신분 세습이니 하는 비아냥은 약과다. 그의 과거 발언에 빗대 "세습 좋아하는 북한으로 가라"거나 "정권에 망조가 들었다"고 개탄한 글에 내가 괜히 오한을 느낄 정도였다. 그나마 점잖은 댓글처럼"정말 이래도 되는거야?"라고 대놓고 묻고 싶었다.
정작 본인은 뭐가 잘못인지 무심한 듯했다. 청와대가 다급하게 재촉하지 않았으면 어떤 꼴로 뭉그적댔을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 "그렇게 눈치 없이 어떻게 외교를 했을까"라고 고개를 저었다지만, 그런 분별을 지녔다면 애초 터무니 없는 짓을 할 리 없다.
그보다 장관과 간부들이 한통속이 된 근본을 살펴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장관 개인의 어리석은 오만과 탐욕 탓이다. 웬만큼 자격을 갖춘 딸의 자리를 요령껏 챙긴다고 탈 날 건 없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간부들까지 동아리처럼 무모한 짓에 동참한 바탕은 국가가 부여한 지위와 권한을 신분적 특권처럼 누리려는 전근대적 의식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시대착오적인 계급의식이 정부와 국가 기강, 사회 다른 계층의 불이익 따위는 돌보지 않는 맹목을 부추겼을 것이다.
위장전입이나 투기의혹보다 큰 탈이 난 것은 이런 배타적 계급의식이 대중의 계급적 분노를 촉발한 때문으로 볼 만하다. 특히 취업 경쟁에 지친 젊은 세대는 자녀 해외교육 기회까지 누린 특권계급이 정부의 고급 일자리를 농단한 것에서 국가의 배신을 느꼈을 법하다. 19세기의 계급적 분노와 항거가 대중의 유일한 보호자인 국가에 대한 배신감에서 비롯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기피하고 경계하는 '계급'용어를 굳이 꺼낸 것도 그 때문이다.
정권과 사회에 무서운 경고
오늘날 사회 계급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러나 계급과 계급의식은 현실에 뿌리깊게 존재한다. 이를테면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선거 후보들은 저마다 가난을 이긴 경험을 내세우며 빈부격차 해소 등 사회정의 구현을 외친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계급정치(Class politics)'에 익숙하다.
대통령이'공정한 사회'를 표방한 것도 그런 각성에서 나온 듯하다. 대중의 삶은 갈수록 힘든 상황에서 다양한 특권계층이 공정성 요구를 짓밟는 현실이 분노를 키운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택일 것이다. 그런 각성과 의지가 얼마나 깊고 굳은지 헤아리기 어려우나, 대중과 특권세력 모두 구체적 실천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면 정권과 사회가 타이타닉처럼 가라앉을 수 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는 무서운 경고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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