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공직 진출의 기회를 준 은인 두 사람이 있다. 한 분은 나를 대통령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해준 노태우 대통령이고 다른 한 분은 한은 총재로 발탁해준 김대중 대통령이다. 두 분 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는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의 4.27대통령 선거 때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임을 마치고 1969년 삼선개헌을 하여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야당인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일 약 열흘 전쯤인 4월 18일 장충단공원에서 약 100만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그 때 그는 두 가지를 특히 강조하였다. 하나는 이번에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선거조차 없는 총통독재체제로 가게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남북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미중일소 등 4대국의 합의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틀 뒤인 4월20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규모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박정희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있어 여기에도 가 보았다. 그는 총통제 운운은 정치적 흑색선전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이번만 당선시켜주면 “다시는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이번이 마지막 임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박 후보가 당선되고 나서 바로 유신독재가 시작되어 선거조차 없어졌다. 김대중 후보의 말이 그대로 적중했다. 특히 그 때의 4대국 안전보장론은 남북 당사자를 합한 오늘의 6자회담과 같은 것이어서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웠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다. 흔히들 그가 아니더라도 20년이나 장기독재집권을 하면서 그런 정도의 일도 못하겠느냐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산업화의 공이 쿠데타의 과보다 훨씬 컸으며 박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은 한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다. 그 힘으로 한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절대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장관과 대사를 지낸 유양수 장군의 요청을 받고 박정희 기념관에 비치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업적을 내가 집필해 드린 일이 있다. 그러나 1971년 3선 이후 유신독재시대의 박대통령은 아쉽게도 공보다 과가 더 컸으며 그래서 박대통령은 중임으로 끝내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 유학 중에 1973년 8월 8일의 도쿄 김대중 납치사건을 접했다. 그 때 미국 신문과 방송은 연일 이 사건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그 뒤 1979년의 12.12쿠데타와 다음 해의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김대중 씨에 대한 사형선고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하루속히 민주화를 실현하여 숨 막히는 군사독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중앙대 교수로서 학생들의 반독재 운동을 지지했던 것도 이러한 경위에서였다.
내가 본 김대중은 지도자로서 확고한 역사관과 실천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늘 공부하는 자세와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했으며 늘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 편에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행동화하기 위해 그가 겪어온 온갖 박해와 고난에 대해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형선고와 바닷물에 던져지는 위기 등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10년간의 망명생활과 55차례의 가택연금 등은 역사적으로도 예를 찾기 어려운 고행이었다. 이렇게 모질고 어려운 극한상황에서도 그는 뜻을 굽히거나 유혹에 타협한 일이 없었다. 이 점은 지난 날 지도자들 가운데 고난을 이기지 못해 또는 살기 위해 일제에 굴복하고 독재와 타협한 많은 사람들과 차별화 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박해를 받은 김대중은 그 후 대통령이 되어 이에 보복하기는커녕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큰 그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기를 그렇게 모질게 박해하고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공로를 인정하고 기념관 건립에 자금을 지원했는가 하면 사형선고를 내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도 사면토록 하여 화해와 용서로 다가갔다.
1998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최초의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룬 뒤에는 IMF 외환위기로 인한 국가부도 위기에서 경제를 살려냈다. 30대 재벌 중 14개, 33개 은행 중 20개만 살아남고 은행원의 42%가 일자리를 잃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여 한국경제의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한국을 IT강국으로 만들고 복지사회의 기틀도 다졌다. 그리고 대북 햇볕정책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막혔던 남북 간에 사람과 기차와 자동차가 왕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평생을 통한 사생관과 업적을 보고 나는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존경해 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2000년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으며 2009년 9월 뉴스위크지는 그를 중국의 덩샤오핑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등과 같이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열한 사람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를 김구 선생의 경우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높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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