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55) 감독이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월드컵 16강 신화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축구대표팀 감독 연임 제의를 고사한 허 감독은 지난달 22일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 사령탑으로 선임돼 4일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2년11개월 만에 K리그 복귀전(1-1 무승부)을 치렀다. 도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허 감독을 K리그 복귀전 이튿날(5일) 오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짧은 휴식기를 보내고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했습니다. 오래간만에 K리그 벤치에 앉으셨는데요.
“휴식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고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연말까지 쉬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필요로 할 때 쓰임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는 생각으로 인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라운드 복귀가 예상보다 빨라진 계기가 있습니까.
“개척 정신이라고 할까요.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저라는 사람이 계산적이지 못합니다. 좋은 조건, 현실에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인천이라는 연고지가 대단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한국의 관문이 되는 도시가 인천입니다. 팀도, 연고지도 발전 가능성이 무궁하다는 점에 끌렸습니다. 현재 K리그를 대표하는 구단으로 서울, 수원을 꼽을 수 있는데 인천도 못지않은 명문 팀으로 자리잡을 잠재력이 충분한 팀입니다. K리그에 시민 구단으로서 자생력을 갖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프로 복귀 첫 경기에서 내용이 좋았다는 칭찬이 많습니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년까지는 팀을 만들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이기면 좋겠지만 올 시즌에는 욕심을 부릴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상황도 되지 않습니다. 올해는 선수들의 마인드를 바꾸고 자세를 바로 잡는데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내년부터 선수 구성 등 본격적으로 팀을 재정비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려고 합니다.”
-월드컵 같은 큰 대회를 치러본 선수들은 한 단계 성장한다고들 합니다. 같은 이론이 지도자에게도 성립한다고 보시는지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도 매 순간마다 배우고 변화합니다. 배움에 끝은 없습니다. 선수들이 지도자에게 배우는 것처럼 지도자도 선수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습니다. 월드컵을 통해 선수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큰 대회를 치러본 지도자의 시야도 넓어지고 사고의 폭도 깊어진다고 봅니다. 선수든 지도자든 축구를 하는 이상 계속 배워가야 합니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30년 이상 축구를 접했지만 아직도 모자라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대표팀과 클럽팀을 지휘할 때는 아무래도 차이점이 있을 듯 한데요.
“대표팀 감독을 스프린터, 클럽팀 감독을 장거리 주자에 비유하는 말에 공감합니다. 대표팀은 능력 있는 선수들을 모아서 단기전에 대비하기 때문에 기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클럽은 장기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빌딩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서둘기 보다는 기초를 탄탄히 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눈 앞의 결과에 급급하다 보면 부실 공사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지도자 뿐 아니라 팬들도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각급 축구 대표팀이 최근 전에 없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계기가 있을까요.
“최고 무대에서 당당하게 싸운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의 모습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각급 대표팀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 한국 축구는 해외에 나가서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경직된 나머지 제대로 우리 실력을 펴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의 최대 소득은 마음 놓고 우리의 기량을 펼쳐 보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을 본 선수들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 청소년 대표팀의 선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유쾌한 도전’을 천명해 화제가 됐었는데요.
“1986년 멕시코 대회부터 2002년 한일 대회까지 월드컵 현장에 있었습니다. 선수(1986), 코칭스태프(1990. 1994), 해설자(1998, 2002)에 이르기까지 맡은 임무는 달랐지만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소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유쾌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즐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서야 과거의 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시에는 좀 생뚱 맞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축구 현실은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선수가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안됩니다. 축구에 필요한 몸과 지능은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축구는 어린 선수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 감독으로 부임한 이유 중의 하나가 새로운 시스템에서 어린 선수들을 육성해 한국 축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 목표를 달성했지만 아쉬움은 남을 듯 한데요.
“조별리그는 예상대로 됐습니다. 그리스를 무조건 이기고 아르헨티나전은 져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나이지리아전에서 승부가 난다고 예상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우루과이전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용에선 앞섰지만 결과에서 졌습니다. 결국 골 결정력이 문제가 됐습니다. 우리가 더 많은 찬스를 잡았고 완벽한 찬스도 많이 잡았지만 골을 넣지 못했습니다. 반면 우루과이는 완벽한 찬스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지요. 특히 경기 후 최선을 다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져 망연자실하고 눈물을 흘릴 때는 정말 마음 속에서 눈물이 우러나더군요.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승렬, 김보경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루과이전에 이 선수들을 꼭 투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경기 흐름이 이들을 투입할 여지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전 승리 때 ‘풍차 세리머니’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의 두 번째 골이 나왔을 때 정말 통쾌했습니다. 골 자체도 그림 같았고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장면이었죠.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이더군요. 특히 원정 월드컵에서 유럽 축구를 꺾어본 적이 없었기에 승리의 확신을 주는 박지성의 골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이지리아전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됐지만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의 골이 16강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남아공 월드컵 후 거취와 관련해 말이 무성했습니다. 지휘봉을 반납할 때까지 고민이 많으셨을 듯 한데요.
“남아공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대회 참가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자리에 연연해서 잡음도 많고 다툼도 심한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축구 대표팀 감독 가운데 자신의 뜻에 의해 물러난 예가 없었습니다. 박수 받고 떠나는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6강이 결정되고 일부 언론을 통해 연임 얘기가 흘러나왔을 때 이미 마음 속에서 퇴진을 결정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얘기를 꺼내지 않은 얘기는 진의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연임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마음은 섰지만 불필요한 논란을 원하지 않아 귀국하기 전까지 뜻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축구대표팀에 국내 지도자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가장 부담이 컸던 것이 그런 점입니다. 내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국내 지도자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16강에 진출했지만 조별리그에서 1승1무1패를 거뒀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2승1패로도 16강 진출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토너먼트 대회에서는 조별리그를 통과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은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때 2승1패로 8강 진출에 실패하며 받았던 심적 타격을 이번 대회 결과로 조금은 씻어낸 듯 합니다.”
-전임 대표팀 감독으로서 조광래 감독께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을텐데요.
“조 감독과는 개인적으로 연세대 동기입니다. 현재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축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대표팀 감독 자리가 참 말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자리입니다.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에 고독하고 중압감이 극심합니다. 그렇지만 조 감독이 잘 해내리라고 믿고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대표팀 경기와 비교해 K리그의 인기가 많이 떨어집니다.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K리그에서도 서울과 수원 같은 경우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칠 수 없죠. 이들과 ‘수도권 더비’로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인천을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우선 팬들을 위해 지루한 경기를 하지 않을 것을 선수들에게 주문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누워서 시간을 끄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경기력도 문제지만 편안하게 관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천의 경우 내년 전용구장이 완공되면 팬들이 좀 더 생동감 있는 경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팬들에게 K리그 복귀 인사를 하신다면.
“월드컵 기간 동안 성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팀 축구도, K리그도 팬들이 있기에 선수들이 힘을 내고 한국 축구가 존재합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지속적인 애정을 보여준다면 한국 축구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민기자 goavs@hk.co.kr
■ 허정무 감독 프로필
▲생년월일=1955년 1월 31일 전남 진도
▲학력=영도중-영등포공고-연세대
▲선수 주요 경력=A매치 84경기 25골,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K리그 지도자 경력=포항 아톰즈 감독(1993~95년),전남 드래곤즈 감독(1995~1998, 2005~2007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2010~)
▲대표팀 지도자 경력=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 코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감독 축구 대표팀 감독(1998~2000,2007~2010년)
▲아디다스컵 우승(1995년), FA컵 우승 3회(1997년ㆍ2006년ㆍ2007년), 동아시아연맹선수권 우승(2008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감독(2009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