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권여선(45)씨가 세 번째 단편집 (문학동네 발행)를 냈다.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 등 7편의 단편이 실렸다. “끊임없이 관계에 집착하면서 그보다 더 집요한 열정으로 관계를 불신하는 소설들”(문학평론가 박혜경)이라는 평을 받았던 두 번째 단편집 (2007)에 이어 그의 이번 작품집도 인간관계란 얼마나 어긋나기 쉬운 것인지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다만 읽기 불편할 만큼 적나라하고 뒤틀린 양상으로 관계의 파국을 보여줬던 전작에 비해 권씨의 필치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소설이 사납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좀 온화하게 써보려 노력”한 결과다.
친절해진 작가의 면모가 여실한 작품이 ‘사랑을 믿다’이다. 이 단편소설엔 현재, 3년 전, 6년 전, 이렇게 3겹의 이야기가 포개져 있다. 주인공 ‘나’는 혼자 술을 마시며 “이제 나를 한낱 친구로만 여기고 잊었을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3년 전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회상한다. 이 만남은 3년 간 사귀던 애인과 헤어져 심란하던 주인공이 예전에 알고 지냈던 여자를 불러내면서 이뤄지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여자가 자신을 좋아했고 제법 심각한 실연의 고통을 겪었음을 처음 알게 된다.
상대의 뜻을 묻지 않고 술안주를 고르고 예전보다 차림이 수수해진 여자를 보면서 주인공은 그녀가 적잖은 심적 변화를 겪었음을 알아채고 자신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미 늦은 일. (여자의) 실패한 사랑은 봉합은커녕 다시금 (남자의) 불우한 사랑을 부를 뿐이다. “그녀는 오지 않고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80쪽)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때늦게 소용없는 사랑을 발견하는 남녀의 사연은 애잔하고 쓸쓸하지만, 그 이면에선 사랑(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단단한 불신이 만져진다. 실연은 자신의 문학적 주제를 고수하면서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낼 방안을 찾던 작가 권씨에겐 맞춤한 소재. ‘빈 찻잔 놓기’와 표제작까지, 이번 작품집엔 어긋난 사랑을 다룬 작품이 여럿이다.
실연과 더불어 작품집의 축을 이루는 것은 가족 서사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리려 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 독신 남성의 이야기인 ‘당신은 손에 잡힐 듯’, 극단적인 성격의 어머니 밑에서 각각 자란 두 남녀 게이머의 삐걱대는 결혼 생활을 그린 ‘그대 안의 불우’, 세 자매의 막내인 작가의 자전소설 ‘K가의 사람들’이 이에 속할 텐데, 이들 단편에서 가족은 관계에 대한 비관과 체념을 학습하는 곳에 다름아니다. 작가 특유의 감칠맛나는 비유적 표현이 돋보이는 ‘웬 아이가 보았네’는 요리사 남편을 둔 미모의 여성 시인을 이웃으로 맞은 동네 사람들의 비틀린 심리를 묘파한 잔혹동화 풍의 소설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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