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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0) 장기수 석방투쟁으로 석방자 3명이 구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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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0) 장기수 석방투쟁으로 석방자 3명이 구속되다

입력
2010.09.0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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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21일에 석방된 사람들은 전원 서울 을지로 입구 서울민협 준비위 사무실에 집결키로 했다. 아내가 석방자 가족들에게 미리 통보해두었던 거다. 나는 대전에서 서승을 접견하고 오느라 늦게 왔는데, 먼저 온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들로 대부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을 뿐인데도 무척 반가웠다. 부산미문화원사건의 문부식, 남민전의 차성환, 김종삼, 박석삼, 제헌의회의 김성식, 반제동맹의 이민영, 서노련의 이옥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홍순 등 다들 탁월한 인재들이었다.

저녁식사 후 인사를 나누고는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다. 물론 장기수 석방을 위한 회의였다. 다들 나에게 구상을 말해보라고 해서 내가 구상해둔 것을 밝혔다. 12월 22일에는 장기수의 현황 파악과 투쟁 준비를 하고, 23일에는 전국 교도소로 장기수 접견을 가며, 24일에는 법무부에 가서 정치범 전원석방 촉구대회를 하자는 거였는데, 다들 찬성했다. 이것은 12ㆍ21석방이 정치범의 전원 석방이 아님을 밝히면서 전원 석방을 촉구하며 남은 정치범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거였다.

다음날 장기수의 현황을 파악하고는 장기수들이 수용돼 있는 전국 10여개 교도소에 3명씩 짝을 지어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서울구치소로 가기로 했다.

23일 전국 교도소로 접견을 갔는데, 접견을 불허해 접견은 못했지만 교도관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바람에 우리들이 접견 온 사실을 장기수들이 알게 되었다. 나는 12ㆍ21석방자 50여명과 함께 서울구치소로 가서 접견장 앞에서 우리들이 접견 온 사실을 장기수들이 알 수 있도록 함성을 지르면서 정치범의 전원석방을 촉구했다.

저녁이 되자 전국으로 접견 갔던 동지들이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접견을 다녀온 소감을 이야기했는데, 기분이 한껏 고조돼 있었다. 비록 우리들도 뒤늦게 석방되었지만 남은 장기수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번 접견으로 미안함을 다소라도 던 데다 장기수들의 사기를 북돋운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투쟁계획을 논의했는데, 다들 일당백의 투사답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특히 부산미문화원사건의 문부식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의 주도자답게 투쟁의지가 단호하면서도 신중했고, 특히 동지들에 대한 배려가 극진했다. 나는 그와의 교분을 이어갔는데,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그의 부친과 그가 부자(父子)사이라기보다 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걸 보고서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사람이라야 역사적인 큰일을 해낼 수 있구나 싶었다.

다음날인 12월 24일에는 과천에 있는 법무부로 가서 정치범의 전원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날씨가 춥고 눈이 오는데도 12ㆍ21석방자들은 물론이고 이미 석방된 사람들과 민가협,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까지 200명 넘게 참여했다. 법무부 앞 계단에서 집회를 하면서 법무부장관의 답변을 요구했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농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춥고 눈이 와 그 많은 사람이 한데서 있기는 어려워 정부종합청사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이 우리를 포위하고는 일반인의 상가 출입을 봉쇄했다. 상가들이 문을 닫고 외부에서 음식을 가져올 수도 없어 저녁식사를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는데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민가협 간사였던 노태훈의 어머니가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눈더미를 헤치고 농성장으로 왔다. 그야말로 성탄절에 오신 산타클로스요 구세주였다. 어떻게 경찰포위망을 뚫고 들어왔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먹을 것을 나눠먹고 있는데 경찰이 쳐들어와 끌어내려 했다. 투쟁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좀처럼 끌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수백명의 경찰이 달라붙어 끌어내는 바람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전경버스에 실렸고, 난투극이 벌어져 다친 사람이 많았다. 특히 1980년 광주학살 직후 서울 신촌에서 ‘학살원흉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결한 김종태의 어머니 허두측씨가 버스통로에서 짓밟혀 허리를 크게 다쳤다.

결국 우리들은 경기도 일원의 경찰서로 분산해서 연행됐다. 나는 10여명과 함께 경기도 광명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서장이 훈계랍시고 황당한 말을 하다가 우리들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날 오후 석방됐다.

그런데 안양경찰서로 연행된 차성환, 이옥순, 이민영 등 세 사람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석방투쟁에 대한 보복이자 앞으로의 투쟁에 대한 위협이었다. 안양경찰서로 가서 항의한 데 이어 다음날 법무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었으나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 가족들이 무척 속상해했다. 차성환은 10년, 이옥순과 이민영은 3년 넘게 징역을 살고 겨우 석방됐는데 다시 구속됐으니 속상해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나를 원망한다는 말도 들렸다. ‘구속된다면 장기표가 구속돼야지 왜 다른 사람들이 구속되느냐’는 거였다. 백 번 맞는 말이었으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래 4,5일 정도 농성을 하고 끝내려 했는데도 새로 구속된 사람들이 있어 농성을 끝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막 석방된 사람들이 집에도 안 가고 계속 농성하는 건 무리여서 형편이 나은 10여명만 남고 전원 집으로 갔다.

그러고서 나는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금방 석방된 사람들이 또다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석방투쟁을 한 건데 이것 때문에 10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을 다시 구속하는 건 야비하기 짝이 없는 일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영래, 이창복, 이부영, 김근태 등에게 여론형성에 신경 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저런 노력으로 1월 4일경 세 사람 모두 석방됐다. 구속된 지 열흘만이었다. 장기수 석방의 당위성을 상당 정도 선전하긴 했으나 세 사람의 구속에 따른 노심초사로 10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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