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총리는 퇴임사에서 케인즈의 말을 인용해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해악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정책 담당자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정부가 며칠 전 발표한 쌀 대책을 보며 이 말을 다시 떠 올리게 된다.
구조적 과잉, 정부 감당은 무리
정부 대책 중 적정 재고를 초과하는 쌀 50만 톤을 주정용 등으로 처분하는 것은 당연한 조처라고 생각한다. 흉작에 대비해 일정량을 비축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필요량을 초과하여 보관하는 것은 비용만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국민 정서'를 이유로 식량으로서 가치가 없는 2005년 산 쌀을 사료용으로 즉각 처분하지 못하고 가공용으로 소비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은 아쉽다.
또한 재고 처리와 함께 앞으로는 과잉 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대풍이 들면 쌀값이 폭락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흡수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이렇게 흡수한 물량은 다음 수확기 이전에 전량 처분하여 과잉 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대풍에 의한 일시적 과잉을 흡수하는 것이지, 구조적 과잉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수요량을 초과해 생산된 쌀은 모두 매입하고 벼 매입자금 공급을 늘려 수확기 쌀값을 안정시키겠다고 한다. 과연 정부는 쌀값을 얼마로 끌어 올리겠다는 것일까.
농촌경제연구원은 이러한 대책이 수확기 쌀값을 11% 끌어올리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쌀값이 오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그러면서 생산은 줄이기 위해 내년부터 4만 ha의 논에 벼 이외 작물을 재배하도록 보조금을 지급하고, 나아가 논 3만 ha를 정부가 매입하여 벼를 심지 않게 하겠단다. 이러한 대책은 결국 정부가 상시적으로 수급을 조절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해악'이 될 우려가 크다.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가 날로 풍부해지고 탄수화물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다이어트 열풍이 부는 한, 쌀 수요는 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증가하고 있고, 의무 수입량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쌀 가격이 하락하고 재배 면적이 줄어들게 하는 것은 시장의 역할이다. 가공용 수요와 수출을 늘리자고 하지만 그 역시 가격이 낮아져야 한다.
정부가 농산물 값은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수급을 맞추려면 재배 면적을 줄이기 위한 보조금은 끝없이 늘어나고, 그러고도 과잉 재고가 상시화 한다는 것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이미 경험한 바이다. 따라서 쌀 수급을 맞추려면 쌀 값이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늦어도 5년 후에는 쌀시장이 개방되는데 국제 쌀값은 우리 쌀 가격의 절반 이하이다. 관세가 그 차이를 메워주겠지만 가격 차이가 클수록 관세 장벽을 뚫으려는 노력이 강해져 수입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고, 또 관세는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쌀 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현재보다 꾸준히 가격이 낮아져야 한다.
'쌀값 지지 못해' 농민 설득을
따라서 일시적 풍작에 의한 것이 아닌 이상, 이제 정부는 쌀값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고 농가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 농가 소득이 문제라지만 '소득보전 직불제'가 제대로 작동하면 쌀값이 작년 가을처럼 목표 가격보다 16%나 떨어져도 농가의 수취 가격은 2% 남짓밖에 낮아지지 않는다.
정부는 이 정도의 부담은 농가가 감당하여야 한다고 당당히 설득해야 한다. 물론 소득보전 직불제의 실제 효과가 이와는 사뭇 다를 수 있는 등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관세화를 단행하여 수입이 늘어나지 않게 하는 정부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전제이다.
이정환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 ·전 농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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