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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이별하는 골짜기' 버려진 간이역… 상처 입은 자들의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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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이별하는 골짜기' 버려진 간이역… 상처 입은 자들의 시간여행

입력
2010.09.0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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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315쪽ㆍ1만1,000원

소설가 임철우(56)씨가 장편소설로는 (2004)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강원 정선군에 있는, 정선선 철도역 중 하나인 별어곡(別於谷)역의 역 이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정선선 운행 축소에 따라 2005년부터 역무원 없는 무인역으로 방치됐다가 2008년 관광용으로 리모델링된 간이역이다. 임씨는 존재가치를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이 역을 주무대 삼아 소설의 주제를 두드러지게 형상화한다.

소설은 별어곡역에 역무원 6명이 일하던 19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몸통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배치된, ‘가을’ ‘여름’ ‘겨울’ ‘봄’을 각각 제목으로 한 4개 장이다. 연작을 이루고 있는 각 장의 주인공은 27세의 막내 역무원 정동수, 최고참 역무원 신태묵, 별어곡 마을에 사는 위안부 할머니 순례, 마을에 제과점을 차린 외지 여자. 정동수는 다른 3편의 이야기에도 등장, 연작소설의 거멀못 노릇을 한다.

네 사람은 모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앓는다. 정동수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온 다방 여종업원이 자살 직전 건 전화를 외면했던 일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신태묵도 불행한 과거로 지독한 불면을 겪는다. 젊은 시절 업무 중 부주의로 한 남자가 기차에 치여 죽는 것을 막지 못한 그는 몇 년 뒤 근무하던 시골역에서 딸과 함께 자살하러 온 죽은 남자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남편이 옛 남편의 죽음에 연루됐음을 뒤늦게 알고 목숨을 끊고, 의붓딸도 신태묵과 의절한다. 제과점 여자 역시 자신의 신고로 죽은 탈영병에 대한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매일같이 역 대합실에 앉아 소일하는 치매 노인 순례의 고통은 한층 역사적이다. 가난한 집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의 묵인 아래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된다. 작가는 다른 3명의 주인공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 순례의 비참한 생애를 펼쳐 보인다. 만만찮은 사료 검토가 따랐을 세밀한 묘사는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 정도의 막연한 이해에 머물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복원한다. 순례는 물론, 다른 세 주인공의 신산한 삶 역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ㆍ사회적 배경에서 연유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광주항쟁을 비롯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천착해온 작가 임씨의 문학적 관심사를 잇고 있다.

4편의 이야기엔 모두 나비가 등장한다. 단순히 작품에 환상성을 부여하는 소품이 아님은 물론이다. 나비는 의붓딸이 거듭된 유산 끝에 출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사위에게서 들은 신태묵에게도, 삶을 포기하고 저수지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던 순례에게도 나타나 그들을 절망에서 끌어낸다. 결국 나비는 인간에게 내재된 자기구원의 힘을 형상화한 것일텐데, 이같은 상징을 동원한 작가의 뜻은 정동수의 말을 통해 확인된다. “한 가지만은 어렴풋이 알 듯하다. 삶은 아름다움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것. 아무리 두렵고 끔찍해도, 결코 도망치거나 외면해선 안 될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39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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