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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한국의 근대박람회' 해외박람회 간 조선인 "암흑서 태어나 광명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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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한국의 근대박람회' 해외박람회 간 조선인 "암흑서 태어나 광명으로 갔다"

입력
2010.09.0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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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규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발행ㆍ688쪽ㆍ4만2,000원

박람회는 한국인들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주요 통로였다. 구한말 몇 차례 열렸던 박람회는 일제강점기에는 36년 동안 무려 173회나 열릴 만큼 붐을 이뤄 한국 사회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등 여러 박람회와 지역축제 등에 관여해온 이각규 한국지역문화이벤트연구소장이 쓴 는 우리나라에서 열린 근대 박람회를 심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에 개최된 박람회의 정치성과 식민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연구 경향과는 달리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박람회가 개최된 시대상황과 주요 박람회를 사례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당시 발간된 공식보고서가 없어 신문과 잡지기사 등을 많이 참고했다.

박람회는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시작됐다. 한국인이 최초로 관람한 박람회는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 후 고종이 미국에 전권대사로 파견한 민영익 일행이 1883년 9월 참관한 보스턴기업박람회였다. 민영익은 귀국해 푸트 주한 미국공사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암흑 속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암흑 속으로 왔다. 나의 앞날의 불길한 운명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운명을 곧 알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유길준이 에서 박람회를 소개했으며,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는 박람회가 개화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최초로 한국이 참가한 세계박람회는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로 비단, 목면, 삼, 호랑이가죽, 무기와 대포알 등을 전시했다. 고종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기회라고 생각해 적극 후원했으나 전시실이 5평에 불과, 미국 신문들로부터 장난감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에도 참가했다. 세계박람회 참가는 우리의 산업수준이 매우 낙후됐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 열린 첫 박람회는 1906년 4~7월 부산에서 개최된 일한상품박람회였다. 한국인 관람객이 당시 부산 인구의 70%에 달했으나, 출품 품목은 사탕 맥주 농기구 시멘트 청주 성냥 등 일본산 수입상품이 주류였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서는 최초로 여성 도우미가 등장했고, 이후 크고 작은 박람회에서 흥행을 위해 기생이 동원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선진성과 한국의 낙후성을 인식시키는 식민지 경영의 도구로 아동박람회, 가정박람회 등 각종 박람회가 거의 매년 개최됐다. ‘박람회의 시대’라 할 만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박람회 때는 시골 사람들이 돈을 벌러, 또는 구경하러 몰려들어 경성의 인구가 20만 명에서 갑자기 100만 명, 또는 200만 명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박람회가 거듭될수록 식민지배구조는 확고해지고, 무기력한 패배주의가 폭넓게 자리잡게 돼 민족 정서와 정체성에 혼란이 초래했다는 저자의 분석이 아프게 다가온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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