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부터 경기 안산시 원곡동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 고타 다케우치(28)씨에게 이 동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쓰레기였다. 일본이나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쓰레기가 이 마을에서는 거리 곳곳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청결-불결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마을의 특징으로 받아들였다.
미술가인 고타 다케우치씨는 그래서 지금 시멘트 가루로 쓰레기 덩이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만든 쓰레기를 거리의 진짜 쓰레기와 나란히 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예정이다. 이 마을에는 그 말고도 중국, 방글라데시, 이란, 네팔, 베트남 등에서 온 일곱 명의 미술 작가가 더 있다. 커뮤니티스페이스리트머스(리트머스)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온 이들은 9월 말까지 원곡동에 머물면서 미술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이주민마을에 들어간 문화예술단체
"예술가는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맞춰 새로운 창작 활동을 합니다. 아시아 작가들을 이 마을로 부른 것은 이곳의 다양성과 거기에서 파생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맛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의 지원을 받아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리트머스의 유승덕(48) 대표가 이들을 초청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유 대표가 강조하는 다양성이 왜 수도권 소도시의 이 작은 마을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국경 없는 마을' 또는 '리틀 아시아'로 불리는 원곡동은 한국 최대의 이주민 밀집 지역이다. 면적 9.91㎢ 의 작은 동네에 50여개국에서 온 이주민이 불법 체류자를 포함해 약 5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 인근 반월공단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 주말이면 이곳에 사는 고국의 친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멀리 부산 등 전국에서 이주민들이 몰려온다. 이들을 대상으로 식당 150여개를 포함해 모두 530여 업소가 영업 중이다.
마을에서는 이주민들이 분주히 오가거나 삼삼오오 무리 지어 서성이고 있으며 중국어 등으로 쓴 간판이 즐비해 이곳의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승덕 대표는 "이주민들이 출신 국가별로 모이면서 다양한 생활 방식과 문화가 형성됐다"며 "색깔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것이 당연시되며 주류도, 비주류도 없고 타인의 시선 혹은 타인과의 차이를 느끼고 살아야 하는 부담도 없다"고 마을을 소개한다.
리트머스 역시 이 다양성을 통해 미술 작업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유승덕 대표 등 미술을 하던 3명은 예술이 삶과 분리되는 현실을 반성하면서 둘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2007년 9월 리트머스를 만들었다.
유승덕 대표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환경이, 삶과 예술을 함께 하겠다는 우리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며 "우리 사회가 점점 늘어나는 이주민과 어떻게 어울릴지를 고민하고 다문화사회 초기의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리트머스는 원곡동 건물 지하에 공간을 마련했다. 문화예술공동체라는 취지에 공감한 미술가, 기획전시자, 시민운동가, 노동자, 이주민 등이 합류해 회원은 70여명으로 늘었다. 모태가 미술이다 보니 회원의 절반 이상이 미술가다. 처음에는 창립멤버 3명이 공동대표처럼 활동했지만 지난해 봄 총회에서 유승덕씨가 대표가 됐다. 그는 사회현상에 대한 풍자와 비판 작업을 주로 해왔다.
2006년에는 판교신도시 개발에 따른 부동산 열풍을 비판하기 위해 시도별 주요 지역의 흙을 화분에 담아 비교, 전시하고 판교 인근의 땅을 평당 1,000원이라는 동일한 가격으로 매겨 상징적으로 판매하는 영상설치전을 하면서 비싼 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에는 '봉이 친환경컨설턴트'를 통해 친환경을 이용하려는 상업적 태도를 비판하고 환경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미술을 개념미술이라고 정의한다.
단체 이름을 리트머스로 정한 데는 실험을 많이 하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다. 리트머스종이가 산성용액이 닿으면 붉은 색으로, 염기성 용액이 닿으면 파란 색으로 변하듯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고 그에 맞는 다양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겠다는 뜻이다. 리트머스종이는 또 가격이 싸기 때문에 실험을 여러 번 해도 부담이 적은데, 이 단체 역시 멈추지 않고 실험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곡동을 작품에 담는 아시아 작가들
리트머스는 창립 이후 여러 활동을 했다. 전시 활동을 비롯해 학술 및 출판, 축제와 파티 등을 통해 이주민과의 교류를 꾀했다. 이 가운데 인기가 있고 이주민의 호응이 좋은 것은 역시 축제다. 유승덕 대표는 "공원 등에서 공연 등 재미있는 축제 형태의 행사를 하면 이주민 수백 명이 순식간에 모인다"며 "그들이 편하게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8년에는 인터-카페란 행사를 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인터-캐리커처가 인기 있었다.
원곡동 만남의광장에서 예술가와 이주민들이 마주보며 서로의 얼굴을 그린 것인데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며 그림만 그리기가 어색해 나이, 출신지, 하는 일 등을 묻고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유승덕 대표는 "한국 예술가와 외국 이주민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지난해에는 욜라뽕따이라는 페스티벌을 열었다. 한 개그맨이 사용한 이 말은 별 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국 말처럼 들리는데, 그것이 여러 언어가 함께 사용되고 가끔 통역의 오류가 생길 수 있는 이 마을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축제의 이름으로 사용됐다. 이 축제는 공연, 영화제, 벼룩시장 등으로 구성됐는데 특히 인기를 끈 것은 국경없는마을클럽데이였다.
150여 식당 가운데 10곳에 클럽 공간을 만들어 음식도 먹고 공연도 했다. 유 대표는 "원곡동의 식당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니라 이주민들의 커뮤니티 센터"라며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이국생활의 고단함을 달랜다"고 말했다.
고타 다케우치씨를 마을로 초청한 것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원곡동레시피를 8월초 시작했기 때문이다. 초청된 아시아 출신 예술가 8명은 두달간 이곳에 머물며 원곡동에서 느낀 것을 예술로 표현할 계획이다. 원곡동에 거주하는 이주민 가운데 아시아인이 많다 보니 초청 대상을 아시아 예술인으로 국한했다. 이들은 미술, 영상, 설치미술, 사진 등을 섞은 작품을 만들고 있어 그 장르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이름을 원곡동레시피로 정한 데도 이유가 있다. 유 대표는 "레시피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음식 재료이기도 하다"며 "원곡동의 다양성을 재료 삼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정한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는 초청 작가에게 흔히 별도의 작업공간을 주는데 이번에는 거리가 바로 작업공간이다. 이들 작가는 대개 거리나, 이주민들 돕기 위해 만든 외국인주민센터 등에서 작업을 한다.
숙소 역시 원곡동 노동자가 사는 일반 가정집의 월세방이다. 일본에서 온 고타씨는 쓰레기를 만들지만 방글라데시의 야스민 자한씨는 전통의상을 입고 거리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대만계 뉴질랜드인 윌리엄 슈씨는 세밀한 지도를 보며 동네를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들은 17일 작품 전시를 하고 활동 보고서도 낼 계획이다.
원곡동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길 것
예술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지역이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승덕 대표는 "원곡동을 특이하게 혹은 어떤 환상을 갖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 이주민의 삶 역시 희로애락이 섞여 있으므로 한국인의 그것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주민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돈벌이다. 일주일이면 꼬박 6일을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돈벌이가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한국어가 서툴고 문화에 대한 지식도 적은 편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문화예술로 이끄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물론 리트머스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비디오 촬영과 편집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는 이주민들을 지속적으로 문화의 세계로 유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유승덕 대표 역시 그런 한계를 잘 안다. 그래서 그는 "문화가 밥이 아니듯 우리는 봉사 단체가 아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하지만 밥을 주지는 않아도 문화예술은 분명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유승덕 대표는 그것이 이주민들이 섞여 살면서 창조하는 원곡동의 여러 현상을 예술 언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트머스의 활동은 그런 점에서 원곡동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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