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인 폭염과 지루한 호우, 기후대가 바뀐 듯 예측 불가능해진 날씨에도 계절의 운행질서는 어김이 없다. 다른 해보다 이르긴 하지만 곧 추석이다. 이제 긴 여름의 시련이 끝나가는가 싶어 숨을 고르고 돌리는 터에 몰아 닥친 제 7호 태풍 곤파스는 예상보다는 덜하지만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무섭게 불어대는 바람으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고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가 하면 정전사고가 잇따랐다. 커다란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도로를 가로지르고, 익지 않은 밤송이와 파란 낙엽, 부러진 나뭇가지가 길바닥을 덮었다. 2일 아침, 키는 작지만 그리도 청청하고 튼튼하던 도심의 소나무도 뿌리 뽑힌 채 엎드려 있었다.
세상을 옳게 사는 길은 어디에
그런데, 이 나무는 왜 쓰러지고 그보다 더 여린 저 나무는 왜 온전한 것일까. 거센 바람이 불어봐야 뿌리 깊은 나무를 알 수 있나 보다. 꽃 좋고 열매가 많을 나무는 얼핏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나 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몰아치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일일 것이다. 가는 길 어디에나 비가 오고 눈이 온다. 그러나 동식물이 한뎃잠을 자며 비와 눈보라, 태풍과 폭풍을 견뎌 튼튼해지듯이 사람도 그런 풍상을 겪으면서 단련된다. 한 인간이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태풍과도 같은 거센 검증과 자극에 의해 짧은 기간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난 달 하순에 끝난 공직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총리 후보자와 장관 후보자 몇 명이 강풍에 쓰러졌다. 임명장을 받은 후보자들의 경우에도 흠결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억울한 사람이 있겠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공직자 임명은 그때 그때의 정치적 환경과 상황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청문회를 보면서 세상을 사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미 장관 직을 마치고 원칙과 정도 지키기를 강조하며 퇴임한 분이 1년여 전 청문회 때 한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는 상식을 뛰어넘을 만큼 많은 부동산과 회원권에 대해 "공직을 맡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예상했다면 신변을 깨끗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과 회원권 문제는 좀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공직을 맡을 만한 사람의 삶은 일반인들과 달라야 하겠지만, '공직용 삶'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아울러 공직살이를 마친 뒤 다시 멋대로 편하게 '사인용 삶'을 살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그래서 그의 말은 우습고 어이가 없다. 그의 말대로 떠나는 뒷모습이 남들에게 아름답게 비치기를 소망한다면 앞모습부터 아름다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과 직장에서 떠났다. 8월 말은 원래 정년과 퇴직의 시기다. 인상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부산영화제를 '아시아 영화의 허브'로 키운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영화제 전용관 개관을 1년 앞두고 올해 영화제를 끝으로 15년 만에 퇴임한다. 오랜 관리 경험을 바탕으로 민과 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에 주력해 영화제의 독립성을 지킨 것이 큰 업적이다. 앞으로 붓글씨와 함께 문인화, 한학을 깊이 공부하고 영화를 한두 편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언론에 대해 정파를 초월한 전문성과 공정성을 늘 강조하고 주문해온 고려대 미디어학부 김민환 교수는 8월 말 정년퇴임을 계기로 평생의 꿈이었던 문학청년의 길로 들어갔다. '시나리오 작가 김민환'을 곧 보게 될 것 같은데, 70대에 글로 전성기를 맞는다고 했다는 점술가의 말이 재미있다.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있다면
이 두 사람은 그동안 묵히고 삭히고 우려온 창작의 욕구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 김 교수의 말마따나 문노(文老)라는 말은 없으니 그들은 문청(문학청년)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을 뿌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창작욕구는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일 수 있으며 내를 이루어 바다에 이르는 삶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세상 사는 일을 다시 생각한다. 이번 태풍이 끝이 아니다. 곤파스보다 더 센 초강력 가을태풍이 또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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