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로 더 잘 알려진 학질은 우리 선조들이 무서워한 질병이었다. 황현(黃玹)의 에는 "하루 걸러 앓는 학질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주 두려워했는데, 노쇠한 사람은 열에 네다섯은 사망했고 젊고 기력이 좋은 사람도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는 대목이 있다. 어려운 일을 면한다는 뜻인 '학질을 뗀다'는 말은 학질이 수년간 재발한 데서 유래했다. '3년 학질에 벼랑 떼밀이' 등 학질 관련 속담이 많은 것도 학질이 우리 선조들을 무던히 괴롭혔음을 뜻한다. 토착성 말라리아는 보건당국의 노력으로 1970년대 말 남한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 말라리아 환자가 남한 지역에서 다시 발생한 것은 1993년, 휴전선 근처에서 근무한 군인이 첫 감염자였다. 그 후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돼 2000년에는 4142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제 서울에서도 환자가 나오는 등 발생지역이 점차 남하하는 추세다. 북한지역에서 넘어오는 중국얼룩날개모기가 주범으로 밝혀지면서 남북 공동방역이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2008년부터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경기도 등 지자체가 직접 공동방역작업에 나서면서 환자발생도 눈에 띄게 줄었다.
■ 하지만 올 여름 들어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말라리아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주 원인은 3월 말 천안함 사건 여파로 대북 말라리아 방역물자 지원이 막혔기 때문이다. 뒤늦게 지난달 17일 10톤 화물차 2대분의 방역물자를 북측에 전달했지만 때를 놓친 탓에 이미 말라리아 환자가 지난해에 비해 30% 정도나 증가했다. 경기도 차원의 지원도 남북관계 경색으로 차질을 빚고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 지원 차원에서 이뤄지던 강원 고성군의 말라리아 방역 지원은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 거기에 더해 올해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잦은 비로 모기 서식환경이 좋아져 9월 말까지 말라리아 발생 비상이 걸렸다. 경기북부, 인천, 강원과 서울 지역에서는 각자가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겠다. 하지만 더욱 필요한 일은 말라리아 공동방역을 위한 남북협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인도주의적 문제나 남북의 공동이해가 걸린 사안은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화가 시급하다. 김정일 위원장 방중을 계기로 북중 경제협력과 밀착이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미약한 끈이라도 이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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