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원원사(遠原寺)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등이 세운 사찰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사찰은 폐사됐고 석탑도 무너졌다. 이 절터가 1930년대에 일본 교토대 고고학교실 조수로 있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ㆍ1889~1954)에 의해 발굴되고 쌍탑인 삼층석탑(보물 1429호)이 복원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희귀 사진과 도면이 공개됐다.
재일 한국인 연구자인 가종수(賈鍾壽) 일본 슈지쓰(就實)대 대학원 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 ‘한국의 고고학’ 여름호에서 노세가 완전 붕괴 상태였던 이 절터를 직접 발굴조사하고 쌍탑을 복원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과 도면 10여 장을 소개했다.
노세가 1928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고 사재를 털어 원원사터를 발굴했으며 1931년에 이를 복원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이번 사진과 도면은 그 구체적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다. 가종수 교수는 “노세가 찍은 사진들은 원원사 석탑의 탑재 수집, 발굴조사, 복원과정을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자료는 노세 자신이 직접 발굴 및 복원작업을 하면서 유리건판에 촬영하거나 도면을 그린 것이다. 노세는 1926년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경주의 서봉총을 방문했을 때 그를 안내한 하마다 세이류(濱田靑陵) 교토대 총장을 수행했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상에 매료됐다. 노세는 이후 10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발굴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찍은 유리건판 사진 2,500여 장이 일본 나라(奈良)시의 문화재 전문 사진회사인 아스카엔(飛鳥苑)에 남아있다. 가 교수는 “노세는 경주와 개성에 있는 왕릉의 십이지상을 연구한 최초의 고고학자”라고 말했다.
노세는 황폐해진 원원사터의 십이지신상에 흥미를 갖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경주 지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 등 고문헌을 조사해 이 절터가 원원사터임을 확인했다. 또 기림사, 불국사, 통도사의 중수기를 조각한 현판이나 통도사의 자운대사부도비 등을 통해 신라시대에 원원사가 경주 지방의 10대 사원의 하나였음을 알아냈다.
사진들 중에는 발굴 전 원원사 석탑 터를 실측하는 장면, 석탑의 사천왕상을 발굴해 들어올리는 장면, 출토된 기와편을 모아놓은 장면, 석탑 기단부의 십이지신상을 가조립한 장면 등이 포함돼 있으며, 노세 자신이 작성한 석탑의 추정 복원도도 있다.
노세는 석탑 부재 외에도 금동약사여래소상, 통일신라시대 당초문 기와, 조선시대 강희(康熙)년 명문이 새겨진 기와 등을 발굴함으로써 원원사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현재 원원사 터에는 노세가 복원한 동서 석탑, 석등, 금당터, 강당터, 부도가 남아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에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상투를 튼 중년의 한국인이 측량용 자를 들고 앉아있는 경주 황복사터 발굴조사 사진, 경주 헌덕왕릉 십이지신상을 조사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포함돼 있다. 노세는 원원사의 십이지신상과 관련해 예천 개심사터 석탑, 구례 화엄사 서탑, 경주 미방리 동곡사터, 암곡리 무장사터 등의 십이지신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가 교수는 “노세의 사진 자료에는 경주와 개성 왕릉의 십이지신상 발굴조사 사진 등도 포함되어 있다”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련 자료인 만큼 우리 연구자들이 체계적으로 연구 조사해 영구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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