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월1일자)부터 매주 수요일 ‘김열규의 휴먼 드라마’가 연재됩니다. 김열규(78ㆍ서강대 국문과 명예교수) 선생은 고전 국문학자이자 한국학자로서, 민족 고유의 성정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천착해 우리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많은 연구 업적과 저술들을 선사해오셨습니다.
선생은 충남대 서강대 등 여러 대학 교수를 거쳐 1991년 당신의 고향 근처인 경남 고성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직장을 부산 인제대로 옮겼는데, 대학 측은 97년 65세 정년이 지난 뒤로도 전임 자리에서 놓아주질 않아 무려 7년간 더 재임하셨습니다. 지금도 선생은 경남 산청의 지리산고등학교 전임강사로 현역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비평과 이론서,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문장으로 동시대인, 특히 젊은이들과의 대화에 열심이셨던 선생은 이번 연재를 통해 당신 생애의 주요 구비들을 되돌아보며 값진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예정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람과 땅과 바다를 벗삼으며 삶의 완성을 추구해온 우리의 한 멋진 이웃의 영롱한 일상의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내가 8.15 광복을 맞은 것은 중학교 2 학년 때였다.
그 학년 초봄부터 우리는 소위, ‘학도 동원’이란 것을 당해서는 이른바, ‘근로 봉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다니던 학교가 공업학교여서 실습 공장에서 기계로 뭔지 모르는 무기의 부품을 제작하는 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니 간접적으로라도 또 본의 아니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편을 들고 있는 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8월 15일 아침에 지시가 하달되었다. 낮 12시에 학교 안의 지정된 장소에 모이라고 했다. 그 당시 천황폐하라고 부르던 일본 왕이 대국민 중대 방송을 한다고 알려졌다.
운동장 한 구석의 그 자리에는 마침 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미리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들도 그들 곁에 그들과 같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정각 열두 시, 우리 앞에 차려진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 나왔다. 일왕의 목소리였다.
“일본 대제국은 전쟁에 패하였소. 연합군에 패하였소”
그 순간 군인들이 땅을 치고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호리에라는 이름의 아주 절친한 일본인 친구는 엎드려서 울먹였다.(그 당시 우리 학교는 ‘일선공학’이라고 해서 조선인 학생과 일인 학생이 반반이었다)
나는 얼떨떨했다. 일본의 패전이 우리 조선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답을 낼 수는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의 손을, 호리에는 움켜잡았다. 손 떨림으로 그의 흐느낌이 전해져 왔다. 나도 힘주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를 달래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건 일본의 패전을 서러워한 탓은 아니었다. 다만 친구의 마음의 아픔을 달래자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국적이며 민족을 넘어선 소년끼리의 우정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방송이 끝나고 다들 일어섰다. 호리에와 나는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걸었다. 나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내가 그렇게 광복을 맞은 그 다음날, 자주 그랬듯이 호리에가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 왔다. 집 바깥에서 여전히 나를 일본식 이름으로 불러대는 그의 목소리를 좇아서 나는 골목에 나섰다. 그는 어제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되어 보였다.
“이제 마음이 괜찮은가?”
내가 묻는 말에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무슨 일로? 어디 놀러라도 갈까?”
“아니야,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그러면서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뭐라고?”
“나와 함께 일본으로 가잔 말이야”
어안이 벙벙해진 내게 그가 다가섰다. 제 어깨를 내 어깨에 기대면서 타이르듯이 말을 계속했다.
“너도 알다시피 미국 군대는 야만이야. 사람을 마구 해친다고. 이제 곧 그들이 조선에 오게 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조선은 좁으니까, 피해서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을 거 아닌가 말이다.”
여기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일본의 내 고향은 땅이 넓은 고장이야. 산도 많고 해서 숨어 살 데가 많아. 여기 부산은 그렇지 못하지 않아. 미군에 잡히면서 고통을 겪을 게 빤하잖아. 그래서 널 여기 두고 내가 갈 수는 없어”
나는 뜨악해졌다. 그의 말이 고맙기는 하지만, 너무 뜻밖의 청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무슨 말로나 둘러대어야 했다. 그의 우정에 금이 안 가게 구실을 대야 했다. 멈칫멈칫 입을 열었다.
“우리 식구는 어떻게 하고?”
달리 말이 생각키지 않았다. 다만 그 어정쩡한 말을 토하면서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만 가만 흔들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이내 눈길을 내리 깔았다.
“그럼”
단지 그 외마디를 남기고는 그는 뒤로 돌아섰다. 힘없이 발을 떼놓았다. 그의 등에 몰리고 있는 나의 눈물 어린 시선을 의식하는 듯이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 우리말로는 ‘그럼’이 될 일본 말, ‘쟈’라는 소리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그를 생각할 적마다 내 가슴 속에서 메아리 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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