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의 지평(地平)만 아니라 '지평(持平)'의 의미도 참 좋다. '공평하게 하여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이니 요즘 유행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해답일 수도 있겠다. 지금의 검사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700여년 전 고려 충렬왕 때(1308년) 감찰사를 사헌부로 고치면서 '사헌지평'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됐다. 고려 후반기에 잠시 폐지됐다가 부활하여 조선시대 내내 존속했다. 정치시비를 가리고 관리를 규찰 탄핵하며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소임이었다. 송강 정철(1536~1593)이 지평이었고, 이준(1859~1907) 열사가 지평이었다.
■ 이준 열사는 알려진 바와 같이 1907년 고종의 밀명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입장을 거절 당하자 분사(憤死)했다. 열사는 마지막 지평이었으며, 1세대 검사로서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는 법 집행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 경무총장에 의해 고소 당하기도 했고, 검사 자격을 박탈 당하는 수난까지 겪었다. 경술국치 100주년(8월 29일)을 계기로 검찰 내부에서 '이준 검사'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귀감으로 삼아야 할 '지평의 표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 검사로서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법무대신을 고소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가 은사(사면)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을 포함시키자 법부(법무부)가 이들을 삭제해 버렸다. 열사가 법무대신을 직권남용으로 고소하자 법부는 항명죄로 체포령을 내렸다. 재판에서 태(笞) 100대가 선고됐으나 고종의 칙령으로 70대로 감형돼 파면을 면했다. 이 사건은 고종이 그를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는 동기가 됐다. 열사는 그곳 시립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3년에야 환국해 서울 독립운동가 묘역에 잠들어 있다.
■ 열사가 목숨을 걸고 들어가려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4일부터 국제검사협회(IAP) 제15차 총회가 시작된다. 회의장 명칭 '리데르잘(Riderzaal)'은 일명 '기사들의 전당(Hall of knights)'으로, 공정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00여 국이 회원인 IAP는 내년 16차 총회와 제4차 세계검찰총장회의를 사상 처음 서울에서 개최한다. IAP 부회장인 김준규 검찰총장은 이번 회의에 참석하고 이준 열사의 묘적을 참배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 양대 회의를 주재할 김 총장이 '이준 검사'의 숭고한 뜻을 잘 새기리라 믿는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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