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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퇴임 앞둔 김동호 부산영화제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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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퇴임 앞둔 김동호 부산영화제 위원장

입력
2010.08.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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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73)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올해 15회 축제(10월7~15일)를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가 1996년 국내 첫 국제영화제인 부산영화제의 출범을 주도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끌어 온 지 15년. 그동안 부산영화제가 한국영화 중흥과 해외진출의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는 점에서 영화인들은 그의 퇴임을 남다르게 받아들인다.

30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동 부산영화제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김 위원장은 “영화제의 성장을 보고 그만두게 되니 시원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15년 동안의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다. 전용관 두레라움 완공을 1년 앞두고 있으니 새로운 사람이 위원장을 맡아 새롭게 준비하는 게 좋다”며 퇴임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짓고 있는 두레라움은 영화관 4개, 야외공연장 등을 갖춘 복합영상센터로 내년부터 개ㆍ폐막식 개최 등 부산영화제의 중심부 역할을 하게 된다. 김 위원장은 “두레라움 개관까지 보고 물러나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지금 퇴임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99억원 예산에 300여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아시아의 독보적인 영화제가 되었지만 부산영화제의 시작은 미약했다. 부산시가 지원한 3억원이 영화제 종잣돈이었고 1회 상영작은 169편에 세계 영화인 2,241명이 찾았다. 지난해 335편, 6,400명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그래도 김 위원장은 “1회 때 20만 관객이 몰리는 것을 보며 굉장한 성공을 거두리라는 자신감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처음 위원장을 맡았을 땐 모든 게 백지상태였고 성공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2001년 6회 때는 아예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해 비상이 걸렸다. 당시엔 모든 영화제에 3회만 국고 지원을 하도록 돼 있었다. 지연 학연 모두를 동원해 예산 10억원을 받아내느라 무지 애를 썼는데 그 때가 참 힘들었다.”

영화계의 큰 어른으로 여겨지는 그도 21년 전엔 영화 문외한이었다. “영화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던” 그는 1988년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마치고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신고식은 호됐다. 영화감독협회에서 취임 반대 성명이 나오는 등 영화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비영화인이 낙하산 타고 내려온다는 데 저항감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당발 인맥과 28년간 쌓은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영진공을 이끌어가며 영화계 숙원 사업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그가 촬영소 건립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을 설득하기 위해 100명과 소주잔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는 영화계에선 전설처럼 전해진다.

말술을 마다 않으며 인맥을 쌓는 그의 술 실력은 부산영화제 성장에도 힘이 됐다. 그는 영화제 때문에 마신 술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원도 한도 없이 마셔 됐으니 측정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회 영화제 때는 마신 술병을 다 모으면 해운대에 설치미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가 주도해 결성한 친목 모임 ‘타이거클럽’도 술이 한 몫 했다. 타이거 클럽은 티에리 프리모 칸영화제 위원장, 사이먼 필드 전 로테르담영화제 위원장, 대만 출신의 세계적 감독 허샤오시엔, 태국 유명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네덜란드 언론인 피터 반 비요렌 등이 참여하고 있다.

“9년 전 로테르담영화제에 갔을 때 필드 전 위원장, 허샤오시엔과 매일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로테르담영화제의 상징이 호랑이이고, 내 이름 마지막 한자가 범 호(虎)다. 호랑이끼리 만났으니 타이거클럽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고, 프리모 위원장이 ‘나도 예전에 부산에서 함께 술 마신 멤버’라며 합류했다.”

타이거 클럽 등을 기반으로 한 그의 국제 무대 인적 네트워크는 부산영화제 성장에 자양분 역할을 했다. 한국영화 해외 진출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칸영화제가 1995년 50회를 맞이할 때까지 한국영화는 4편만 상영됐다. 96년 칸 사람들이 부산을 찾은 뒤 98년에만 한국영화 4편이 칸을 찾았다. 2001년엔 ‘춘향뎐’(감독 임권택)이 경쟁부문에 첫 진출했고, 2002년엔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기여가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이다.”

김 위원장의 퇴장은 불모지에서 출발한 국내 영화제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부산영화제가 든든한 반석 위에 놓인 건 아니라며 부단한 노력을 주문했다. “상영작 구성이 좋지 않으면 언제 추락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세계인이 늘 찾을 수 있도록 내실을 다져야 한다.” 그는 특히 “(정부로부터) 지원은 받지만 간섭을 배제해나가는 것이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숙제”라고 강조했다.

“다른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수석 프로그래머 역할을 하지만 난 예산을 얻어내고 정부나 부산시의 압력 등을 막아내는 일에만 주력해왔다. 난 대중적인 영화를 좋아해서 프로그래머들에게 영화 추천도 절대 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모으면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될 수도 있다. 매번 대선 때면 유력 후보들이 부산영화제 개막식 무대 등에 오르려 했는데 다 막았다. 예전 많은 문화관광부 장관들이 축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영화제가 독립성을 잃으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김 위원장은 15년간 자신이 찍은 사진 70점을 부산영화제 기간 영화제 이벤트 공간인 피프빌리지에서 전시하며 자신의 세계 영화제 체험기를 출간할 예정이다. 부산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김 위원장의 퇴임을 기념한 송별 파티를 연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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