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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1> 사랑과 열정을 쏟은 총재직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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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1> 사랑과 열정을 쏟은 총재직 4년

입력
2010.08.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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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31일 나는 4년의 임기를 마치고 한은 총재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4년이라는 한국 중앙은행 총재 임기는 외국의 예에서 보면 짧은 편이다. 미국의 그린스펀 연방준비이사회 의장은 1987년부터 4년 임기를 다섯 번 연임해서 21년을 재임했고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중앙은행 업무의 독립성과 안정성에 비추어 임기 6-7년에 연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내 앞에 스물한 분의 총재 가운데 4년의 임기를 채운 분이 김유택 김세련 김성환 김건 전철환 씨 등 다섯 분에 불과했다. 1년을 채우기가 어려웠던 정부의 국무위원 직을 생각하면 4년은 긴 편이라 할지 모르지만 중앙은행 총재 임기도 이제 성숙사회의 모습을 담을 때가 아닌가 싶다.

임기 4년 동안을 뒤돌아보니 성취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경제는 최선을 다 했으나 부동산 거품과 신용카드 사태로 인해 썩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2002~05년의 4년간 평균으로 보면 물가는 3.2%로 3.5%의 목표상한선 내에서 안정되었고 경제성장률은 4.7%로서 잠재성장률 수준을 유지하였다. 외환보유고는 2001년 말의 1,000억 달러에서 2005년 말에는 2,100억 달러로 늘었고 주가도 많이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민생의 어려움이었다. 세계화 개방질서와 중국 저임경제의 부상으로 경쟁력 있는 대기업은 호황을 누렸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 농업은 침체했으며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해 실업자는 늘어났다. 여기에 부동산 가격상승과 신용카드 부채의 누적으로 서민들의 박탈감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대기업 소득은 크게 늘어 경제성장을 이끌었으나 가계소득은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이러한 경제양극화 현상이 중앙은행의 책임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로서는 응분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은법 개정을 이루어내고 이런저런 내부혁신을 추진하여 한은의 독립성 강화와 위상제고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 한은의 권한과 역할은 크게 미흡하여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하며 내가 추진하려던 화폐제도 개혁은 미완성인 채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직장연금도 없고 사실상 퇴직금도 없는 한은 직원들에게 퇴직 후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2,000여 한은 직원들은 나를 믿고 잘 뒷받침해 주었다. 내가 성취한 일들은 이러한 상호신뢰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교수 때 그랬던 것처럼 한은에서도 매년 전체 직원들의 평가를 받았다. 결과는 매년 비슷하게 나왔는데 예컨대 2003년의 경우 잘함 70% 보통 26% 잘못함2% 기타 2%였다.

한은 총재직을 수행하면서 나는 나의 사랑과 열정을 쏟아 넣었다. 그런 만큼 재임 4년간은 내 생애 가장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시간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가 내 인생의 피크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한은에 돌아와 나의 일선 활동을 마감한다는 것은 내게 더 없는 영광이며 행복이었다. 2001년 65세로 교수 정년을 맞이한 다음해 한은 총재직을 맡게 된 나는 한은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총재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성태 부총재에게 총재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것도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이성태 총재는 평생을 한은에서 보낸 사람으로 소신이 뚜렷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2006년 3월 31일 오후 일과를 마칠 무렵 퇴임식이 있었다. 강단을 메운 직원들에게 나는 지난 4년간을 회고하고 성과는 미흡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은을 깊이 사랑한 총재, 한은 독립성과 위상을 높이려 노력한 총재, 경제와 민생을 위해 고뇌한 총재로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연인으로 돌아가 손수 차를 몰고 팔도강산을 누비고 다니겠다는 말로 이임사를 마무리했다. 은행에서는 사무실과 차량 등의 편의를 계속 제공하겠다고 하였으나 조직에 부담을 남기고 싶지 않아 모두 사양했다.

두 줄로 도열한 직원들 사이를 걸어 나올 때는 참았던 눈물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한국은행의 구석구석에는 나의 정성이 담겨 있고 애환이 서려있으며 사람들과는 정과 신뢰가 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내 나이 일흔, 지금까지 고난과 싸우며 현역으로서 오르는 길을 걸어 왔다면 이제 나는 내려가면서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길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하는 이런 저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이 들어 후선에 물러나 있으면 정신도 늙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과거 지향적이어서 전진하는 역사방향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을 보아왔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남과 사회전체를 걱정하고 그늘진 곳 약한 사람들을 돌보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퇴임하고 나서 맨 먼저 간 곳은 고향인 전북 김제였다. 조상에 성묘하고는 내가 오래 전부터 약간의 장학금을 지원해온 모교 백석초등학교를 찾았다. 한 때 600명이 넘었던 이 학교는 이제 전체 학생이라야 100명도 되지 않는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모두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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