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은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토정이란 마포 강변에 지은 허름한 ‘흙으로 만든 정자’이다.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을 정자삼아 글을 읽었다 한다. 그는 을 많이 읽고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은 그가 지은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이 19세기에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구리로 된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벗어서 밥을 지어 먹었다. 평상시에 글을 읽으면 밤을 새웠다. 한 겨울에 나체로 눈 덮인 바위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한 여름에 물을 마시지 않기도 했다. 열흘 동안 익힌 음식을 먹지 않기도 하고, 수백 리를 걸어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한다. 길을 가다가 잠잘 때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집고 몸을 굽인 채 머리를 숙이고 서서 5, 6일이나 자는데 숨쉬는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한다. 가고 싶은 곳은 안 가본 곳이 없고,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면 어디건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이이, 남명, 송익필 등 저명한 인사들과 친했다.
그러면 그는 왜 방랑생활을 했는가? 을사사화에 가장 친한 친구 안명세(安名世)가 처형된 뒤에 세상에 숨은 것이다. 처가의 불행도 일조를 했다. 장인은 모산수(毛山守) 이정랑(李呈琅)이다. 그는 충주사람 이홍남(李洪男) 고변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래서 세속에 정이 붙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성격이 소탈하고 개결해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토정은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민초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그러는 중에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애민, 보민, 중민 양민, 안민이 그의 정치사상의 중심이다. 그가 장가갔을 때의 일이다. 초례를 치른 다음날 토정은 새 도포를 입고 나갔다가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도포는 세 조각을 내어 홍제교 거지에게 주고 왔다고 했다. 애민의 실천이다.
그는 늘 ‘내게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긴다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1573년(선조 6)에 기회가 왔다. 이 해에 그는 은일(隱逸)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이 된 것이다. 토정은 정부에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 )를 포천군에 비지(飛地)로 소속시켜 주면 군민을 부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곡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들어주지 않자 그는 사임했다. 얼마 있다가 아산현감이 되었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뜻대로 안 되자 병이 들어 죽었다.
도덕주의, 농본주의에 찌든 순정주자학자들로서는 어염(魚鹽)과 같은 돈벌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토정은 상공업을 중시하던 개성사람 서경덕의 제자였다. 어염을 개발하자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바다를 중시하는 이러한 실용주의 사상은 그의 조카 이산해(李山海)에게 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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