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끝내며 - 전문가 좌담
일제의 한국 강점 36년이 남긴 상처는 2010년에도 여전히 깊고 쓰라리다. 한국일보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시리즈를 연재했다. 이 땅과 해외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거나 혹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 당시의 시대상을 재조명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묻는 기획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이 기획의 의미, 한일 강제병합 100년의 의미를 함께 들어보는 전문가 좌담을 마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원로 사학자 강만길(77)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근현대사학회장인 한철호(51)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근현대 생활사ㆍ도시사를 전공한 전우용(48)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가 지난 27일 한국일보사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에게 남긴 물적ㆍ정신적 상처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100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_ 일제강점기의 역사 현장은 치욕의 현장이라는 이유로 보존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건물이 남아있건 흔적만 남아있건 이런 장소들을 보존할 필요가 있을까.
▦강만길= 그것들을 없앤다고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지 않는다. 역사라는 것은 사실이 바탕이 된다. 있었던 사실은 되도록 많이 남기는 것이 좋다. 치욕스러운 것들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에서 배울 바를 찾는 것이 옳은 길이다. 이는 민족사의 자신감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감이 있으면 이런 곳들을 보존해 치욕을 안긴 상대방에게 교훈을 줄 수 있고 우리 자신도 이런 치욕스런 부분에 대해 자성할 수 있다. 중요한 것만 보존해도 된다.
▦한철호 = 치욕스러운 것은 감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일제 강점의 흔적도 아픔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의미화해야 한다. 그 방식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붕 첨탑만 보존해둔 조선총독부 철거 사례처럼 우리의 전통을 훼손시켰던 건물은 상징적인 부분만 남겨도 그 시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 나고야에는 개발 압력 때문에 철거될 수밖에 없었던 메이지시대 건물의 부분부분을 모아 조성한 ‘메이지무라’라는 곳이 있다. 꼭 원래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전우용 = 우리 입장에서는 그 건물들이 치욕의 현장이겠지만 일본 우파들은 시혜를 베푼 증거라고 해석할 것이다. 남아있는 건물은 미래에도 한일간 역사인식의 싸움터가 될 것이다. 건물을 보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논쟁보다는 그 건물을 보존함으로써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일이 생산적이다. 일본의 건축행위들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건축공간을 읽는 독법과 달랐다. 우리가 중시했던 자리를 의도적으로 점거해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묵살하고 전도시키고자 했다. 이런 건물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_ 남산 통감관저터에는 한국 병탄에 앞장섰던 하야시 곤스케라는 일본 외교관의 동상 좌대가 벤치로 쓰이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최근 이 좌대가 훼손됐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민족적 콤플렉스의 표현 아닌가.
▦전= 워낙 피해가 강렬해 민족감정에서 비롯된 이런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가 범죄라면 그런 유적이나 흔적은 범죄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범죄사실을 입증할 때 증거물을 차곡차곡 챙기고 현장검증을 하는데, 피해자가 격분한 나머지 “저 칼로 나 찔렀지” 하면서 칼을 화장실로 던져버린 셈이다. 남아있는 것들을 증거로 일본 식민통치의 범죄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한= 치욕을 되새기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묻는 식으로 승화시키는 자세가 요구된다. 가령 식민지 시기에도 국치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됐다. 처음에는 이 날을 반성하자고 했지만 나중에는 ‘희망의 날’로 삼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2년 8월 29일 재미동포들이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에 태극기를 게양한 일도 있다. 식민지배가 남긴 여러 모순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이 격해질 수는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그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전=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좌대는 사실 별것이 아니었는데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자마자 훼손됐다. 훼손된 동상 좌대는 2010년 한국인들의 일제시대 유산이나 흔적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도 될 것이다.
_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보존하지 말까라는 문제도 중요하다고 본다.
▦전= 강 교수님께서 중요한 것만 보존해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사실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질 것도 없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원형대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고 흔적만 남아있는 것도 제대로 찾기 어렵다. 토건개발시대에 ‘일제잔재 청산’?아주 좋은 재개발의 명분이기도 했다.
▦강= 우리가 이런 것은 철저히 청산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인간 청산은 제대로 못한 것은 모순이다. 사람은 그대로 두고 물건만 정리한 셈이 됐다. 역사학자들의 책임도 크다. 우리 정도의 문화적 역량을 갖춘 나라가 해방된 지 불과 20년 만에 그 침략자와 국교 재개 조약을 맺었다. 그것도 침략자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다. 부끄러운 일이다.
▦한= 손상된 유물유적들을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전= 밀물 썰물이 왔다 갔다 하며 모래톱이 새겨지듯 하나의 구조물에는 역사적 파장이 다층적으로 담겨있다. 예를 들면 남산 리라초등학교 자리는 경성신사 자리인데 신사의 석등(石燈) 받침을 뒤집어 테이블로 쓰고 있다고 한다. 원래 용도대로 똑바로 세워두는 것이 더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런 흔적은 해방 후 한국인들이 신사에 대해 느끼는 감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_ 건축물 등은 식민지배의 가시적이고 물적인 흔적들이지만, 식민지배가 남긴 정신적ㆍ문화적 내상(內傷)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된다.
▦강=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 민족의 원한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상실감이나 정신적 피해가 더 커졌다. 심지어 어떤 일본 기자는 한국에서 반일감정이 높은 이유가 독자적 독립운동의 결과로 해방되지 못한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망발을 했다. 중세 이전에 일본으로 문화를 전해준 우리가 일본에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대단히 수치스럽고 가슴아픈 일이다. 일본의 우익들, 일본의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을 그만둬야 한다.
▦한=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근대화시켜줬다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근대적 시설을 만들어줬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 최근 일본 총리의 담화는 사람을 때렸으면서 미안하다고 얘기는 하는데 그 사람의 정신적 피해까지는 얘기 안하고 진정으로 사과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그런 모양이다. 자신들이 침략자라는 입장에서 피해자의 물적ㆍ정신적 고통까지 이해하고 껴안아주는 자세가 요구된다. 부분적인 문화재 반환이라든지 형식적인 사과로는 정신적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전= 좀 확대된 관점에서 생각하고 싶다. 1970년대까지 나는 ‘기차에 돌 던지지 말아라’라는 말을 학교에서 듣고 자랐다. 기차, 전차, 은행 같은 것은 근대의 물질적 상징으로 서구에서는 기차역이 개통되면 축제가 벌어졌다. 그런데 식민지 시기에 우리는 은행, 기차역, 관공서 같은 것들을 파괴한 사람들을 독립운동가로 추앙했다. 그런 문화는 해방 후에도 반복됐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일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졌다. 근대성을 수용하는 정신적 태도가 왜곡된 것이다.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트라우마의 일종이라고 본다.
▦한= 해방 후 분단이 됐고 특히 남한의 경우 독립해방투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해방 이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 시절에 이뤄졌던 공공시설에 대한 파괴행위 같은 것이 해방 후 친일 또는 독재정권을 향해서도 계속됐다. 나쁜 유산들은 개선돼야 하는데 해방 후에 전개됐던 정치상황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는 변화가 없어 그런 것들이 용납된 것이다.
▦강= 사실 문화민족 사회가 남의 지배를 받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민족해방투쟁사를 엮어서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야 식민지배로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민족해방투쟁사를 쓸 사람도 없고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국사를 가르쳐도 고대사밖에 못 가르쳤다. 해방 후 정부는 ‘우리말 도로찾기’라는 작은 책자를 보급했는데 일제 때 교육받은 교사들은 그것조차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국어 실력이 형편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적 개혁이랄지 식민지배로 인한 정신적 상처의 치유는 언감생심이었다.
▦한= 해방 후 국립대학안이 마련됐을 때 서울대 입시에 국어 과목을 넣자 말자 하는것으로 옥신각신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국어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시험과목에 넣느냐는 주장과 해방된 나라에서 어떻게 국어시험을 제외하느냐는 주장이 갈렸다는 것이다.
▦전= 식민지배의 역사는 36년 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 이후 한국인들의 의식과 행동과 문화에 몹시 부정적인 결과를 끼쳤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시민적 권리에 대한 평가절하 같은 것들은 식민지 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치ㆍ문화ㆍ사회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해악은 정말 광범위하다. 인적 청산도 중요하겠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여진 체질을 바꾸는 문화ㆍ제도ㆍ사회적 틀의 개혁을 생각할 때다.
▦강= 일상성 속의 식민주의는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일본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일본의 병폐인 학교폭력이나 따돌림 같은 것이 그대로 한국에 전파된다. 가까우니까 더 치명적이다.
_ 불행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공존해야 한다. 역사갈등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강=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당면 과제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태도다. 일본이 한국 강제병합을 무효선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안되면 지역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한국 지식인들과 공동선언에 만족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전=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동아시아가 뒤처지니까 또다른 차원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성찰할 필요도 있다. 양국 화해의 전제는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충분하고 확실한 사과다. 이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남북한과 중국을 포괄하는 국제적 연대로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
▦한= 가장 가까운 나라에 자신을 적대시하는 5,000만을 두고 일본이 행복할 수 있을까. 강제병합 100년인 올해는 일본이 과거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도 왜 식민지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내적 원인에 대한 진지하고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한다.
진행ㆍ정리=이왕구기자 fab4@hk.co.kr
■ 일제 강점기의 치욕 저항 일상… 공간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짚어
한국일보가 2010년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지난 2월 2일부터 7개월 동안 매주 화요일자에 연재한 ‘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시리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국내외 30곳의 현장을 기자들이 직접 찾아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상을 재조명하고 역사를 보는 현재와 미래의 시각을 가다듬는 기획이었다.
기획은 한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한국인들이 폭압적 식민통치로 어떤 고통을 받았으며 어떻게 저항했는지, 식민지배로 한국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을 이 땅과 해외에 남아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짚었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덕수궁 중명전,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국권 상실의 현장인 남산 기슭의 통감관저 터 등은 망국의 치욕을 되새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자 150여명의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안동의 독립투사 백하 김대락의 고택, 4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등에서는 일제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은 우리의 저항 의지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추체험할 수 있는 공간에도 주목했다. 근대적 상품경제의 총아인 동시에 식민지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여줬던 미쓰코시 백화점 자리, 식민지 밤문화의 상징적 공간인 명월관 터 등이 그런 곳이었다.
이밖에도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무려 14년 동안 방치됐던 일본 가나자와 시의 암장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던 여성들의 수난을 지금도 증언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의 위안소 다이이치 살롱 등 망국의 한을 품고 있는 해외의 현장들도 찾아갔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에 이 기획이 연재되는 동안 국내외에서 제보도 이어졌고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그 흔적이 잘 보존돼 있건 사라져가고 있건 식민지 시기의 현장을 추적함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게 해주는 의미 깊은 기획이었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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