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물끄러미 혀에 가닿는 그 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물끄러미 혀에 가닿는 그 말

입력
2010.08.30 12:01
0 0

박신규

아내의 애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뒤

이혼에 재산분할까지 해준다는 친구를 만나

미친놈이라고 몰아세울 때

그저 웃으며 돌아온 말 한마디가

참 병신 같았는데,

수절하며 땅만 팠던 할머니의 반세기

빈 쌀포대로 꺼지던 날

왜 그 모양으로 사셨느냐고

아버지 통곡하며 물을 때도

무슨 임종게라고 미소짓는 그 말은

기역자 허리보다 한심했는데

이제 그만 죽여달라, 어머니에게 악쓰다가 혼절한 봄날, 모르핀에 녹아 온몸을 흐르다가 수술자국 틈으로 비어나오던 말,

‘앙구찮응게’

귀찮지 않으니까, 로는

도시 통역될 수 없는 말,

병신 같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들꽃 같은 사람들 눈물들

호명하며 살다가 수의로 꺼내 입었던 그 말

‘앙구찮응게’

짐승으로 태어나고 간혹 사람으로 던져져서

또다시 얻어맞고 걷어차이고, 그리고

삶은 또 지속적으로 뻔하였다

그러하여도 혼자서 꾸역꾸역 허기를 씹다가 문득,

이빨에 낀 밥알에 혀를 대고

물끄러미 굴리다 홀리듯 홀리는,

그 말씀, 그 이름들……

● 십수 년 전에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제 고향 김천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와 현장을 연결해서 인터뷰도 진행했는데, 그때 김천의 명산물인 징을 만드는 장인이 나왔습니다. 징을 제조하는 일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김동건 아나운서가 “그동안 징을 만드시면서 힘든 일도 참 많았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노인이 울상을 짓더니 “고만 엉기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건 우리 고향에서 잘 쓰는 말인데 어떤 표준어로도 옮길 수 없는,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설움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인생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때문에 어쩌다 어른들 말씀 듣다가 그 말이 나올 때면 우리 고향 사람들은 참, 뭐랄까, 아무튼 엉기납니다.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