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규
아내의 애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뒤
이혼에 재산분할까지 해준다는 친구를 만나
미친놈이라고 몰아세울 때
그저 웃으며 돌아온 말 한마디가
참 병신 같았는데,
수절하며 땅만 팠던 할머니의 반세기
빈 쌀포대로 꺼지던 날
왜 그 모양으로 사셨느냐고
아버지 통곡하며 물을 때도
무슨 임종게라고 미소짓는 그 말은
기역자 허리보다 한심했는데
이제 그만 죽여달라, 어머니에게 악쓰다가 혼절한 봄날, 모르핀에 녹아 온몸을 흐르다가 수술자국 틈으로 비어나오던 말,
‘앙구찮응게’
귀찮지 않으니까, 로는
도시 통역될 수 없는 말,
병신 같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들꽃 같은 사람들 눈물들
호명하며 살다가 수의로 꺼내 입었던 그 말
‘앙구찮응게’
짐승으로 태어나고 간혹 사람으로 던져져서
또다시 얻어맞고 걷어차이고, 그리고
삶은 또 지속적으로 뻔하였다
그러하여도 혼자서 꾸역꾸역 허기를 씹다가 문득,
이빨에 낀 밥알에 혀를 대고
물끄러미 굴리다 홀리듯 홀리는,
그 말씀, 그 이름들……
● 십수 년 전에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제 고향 김천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와 현장을 연결해서 인터뷰도 진행했는데, 그때 김천의 명산물인 징을 만드는 장인이 나왔습니다. 징을 제조하는 일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김동건 아나운서가 “그동안 징을 만드시면서 힘든 일도 참 많았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노인이 울상을 짓더니 “고만 엉기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건 우리 고향에서 잘 쓰는 말인데 어떤 표준어로도 옮길 수 없는,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설움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인생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때문에 어쩌다 어른들 말씀 듣다가 그 말이 나올 때면 우리 고향 사람들은 참, 뭐랄까, 아무튼 엉기납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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