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후 경남 함양군 함양여중 강당에서 열린 지리산문학제 개막식. 제전위원장 문인수 시인이 최승자(58) 시인에게 제5회 지리산문학상을 전달하자 객석에선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큰 소리로 “최승자 만세!”라고 외쳤다. 최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등단 31년 만에 상을 받게 돼서 기쁩니다.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짧고 담담한 수상소감이었다.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문학상 수상 여부로 평가될 수는 없지만, 그 누구도 아닌 최승자 시인이, 1979년 등단한 후 첫 시집 (1981)에서 죽음과 절망에 사로잡힌 삶에 대한 격정적 토로로 한 시대를 감염시켰던 빼어난 시인이, 그동안 ‘무관’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다. 최씨의 수상은 늦은 만큼 뜻깊다. 무엇보다 이번 상에는 정신분열증으로 오래 투병하다가 올해 초 11년 만의 신작 시집 을 내며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그를 향한 환대와 격려가 담겨 있다.
시상식이 있던 날 오전 최씨는 일찌감치 행사장에 도착했다. 지난 5년 간 자신의 병 수발을하며 보호자 역할을 해온 외숙부 신갑식씨 부부와 함께였다. 안부를 묻자 최씨는 “좋아요, 이젠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아요”라고 했다. 석 달 전에 퇴원했다고 한다. 최근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 덕분에 살이 많이 붙었다는데, 그렇게 늘린 체중이 겨우 34㎏이다.
_ 어떻게 지내시나요.
“2년 전 서울에서 경주로 이사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 마시면서 먼산바라기 하다가 밥 먹고 책을 봅니다. 담배는 하루 한 갑 정도. 요즘은 주로 문학잡지와 신간 시집을 봐요. 다시 정신 차리고 문학 세계에 들어왔으니 지난 세월 문단의 이슈가 뭐였는지, 어떤 시인들이 등단했는지 따라잡아야겠다 싶어서요.”
_ 첫 문학상이라니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예전엔 여성 시인에게 상을 잘 안줬어요. 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김혜순 시인 등과 더불어 ‘해체파’라고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남자 시인들만 상을 받았거든.(그러고 보니 최씨와 같은 해에 등단한 김혜순 시인도 1997년에야 첫 상을 받았다) 또 내가 문단이나 학계에서 별로 활동 안하고, 혼자서 조용히 번역만 하고 지낸 탓도 있겠죠. 서운했냐고? 글쎄, 별로 그렇진 않은데.”
_ 이번에 낸 시집이 수상작인데, 예전 작품과는 많이 다르네요.
“병치레하면서 이런저런 공부(서양 신비주의와 노자)를 하며 시에서 등을 완전히 돌렸죠. 공부를 해도해도 모르겠기에 그만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병이 좀 나아지더라고. 그래서 이젠 시를 써보자, 너무 다른 세계에서만 놀았으니까 달라진 내가 있을 것이다, 그걸 추적해보자, 그래서 지난해 7~8개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시를 썼어요. 시가 나올 때만 쓰던 예전과는 달랐죠. 그렇게 쓴 40편을 예전에 간간이 써놓은 20편과 합쳐 시집을 냈죠.”
“시집을 묶고 보니 스스로 어떻게 달라졌더냐”고 묻자 최씨는 네 번째 시집 (1993)(최씨는 이 시집이 바로 “내 시의 무덤”이라는, 이제 그만 시를 작파하겠다는 뜻을 담은 제목이었다고 한다)를 내고 시작한 오랜 ‘공부’를 30분가량 길게 설명했다. 목소리는 점점 열띠어졌고, 이때만큼은 기자와 눈을 오래 맞추며 이야기했다.
의학, 신비주의, 서양철학, 노장사상을 공부하며 그가 궁구한 것은 요컨대 인간 사회 및 역사의 배후에 있는 초월적 세계인 듯했다. 한때 자신의 정신적 균형을 흔들었던 그 오랜 공부의 감회를, 그는 최근 시집의 표제시를 빌려 ‘쓸쓸해서 머나먼’ 일이었다고 했다. “나도 어려워 중도에 공부를 관둔 내용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쓸쓸해지는 거죠.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이니까요.” 그는 “공부를 해도 잘 풀리지 않았으니 결국 문학으로 풀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최씨는 “도무지 어딘지 모를 장소와 시간 속에 펼쳐지는, 아주 신비하고 이상하고 설화적이면서도 문명비판적인 메시지가 가미된 소설을 쓰려고 생각을 굴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가 원래 생각은 잘한다”며 웃는 그의 집필계획 중엔 또 근사한 지식인소설도 포함돼 있었다.
함양= 글ㆍ사진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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