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작가 한계륜씨의 영상작품. 한 척의 배가 밤바다를 유유히 떠가고 있다. 때로 총천연색 파도가 화면에서 요동을 치기도 하지만 배는 흔들림없이 제 길을 간다. 그 옆에 김유근(1785~1849)의 수묵산수도 ‘소림단학도’가 걸렸다. 먼산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배를 타고 있는 강태공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200년의 시간을 넘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서가 함께 흐른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9월 1일 개막하는 ‘춘추(春秋)’전은 이처럼 현대미술과 고미술 작품들을 짝지웠다. 고미술과의 만남을 통해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마련된 전시로, 형식적 측면뿐 아니라 작가의 작업 태도나 주제의식 등 다양한 관점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고미술은 현대미술을 통해 새롭게 다가오고, 현대미술은 고미술을 통해 그 본류를 더듬는다.
화가 이세현씨가 붉은색으로 그린 풍경화 ‘Between Reds’는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와 파트너가 됐다. 군 복무 중 적외선 야간 투시경에 비친 비무장지대의 풍경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이씨는, 산수화 특유의 다시점으로 그린 사라진 고향 마을과 비무장지대 등의 풍경에 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를 담았다. 거대한 물줄기 아래 왜소한 크기의 인물과 집을 그려넣어 박연폭포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 정선의 그림과 일맥상통한다.
김홍도나 정선의 그림 일부, 혹은 그림의 배경이 된 풍경 중 일부를 확대해 그리는 화가 정주영씨의 유화 ‘인왕산’은 정선의 ‘인왕산도’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윤석남씨가 나무로 만든 개 조각상 뒤에는 15~16세기 말을 사육하던 목장 풍경을 담은 ‘방목도’(작자 미상)가 걸렸다. 조각가 정현씨가 철근과 나무로 만든 조각은 정학교(1821~1914)의 ‘죽석도’를 보고 만든 것처럼 그 형상이 꼭 닮았다.
세필로 커다란 화면을 촘촘하게 메워 그린 김홍주씨의 그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첩’과 함께 단순함에서 뽑아내는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템페라 물감으로 단숨에 선을 그어 완성하는 송현숙씨의 그림과 조선의 명필 윤순(1680~1741)의 초서는 필(筆)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이밖에 리경씨의 인체 조각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 민중미술가 신학철씨의 그림과 지옥을 그린 18세기 ‘시왕도’, 목욕탕의 여인을 그린 이영빈씨의 드로잉와 19세기 ‘여인초상’이 짝을 이룬다. 10월 31일까지. (02)720-1524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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