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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9) 석방 당일 장기수의 상징 서승을 접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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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59) 석방 당일 장기수의 상징 서승을 접견하다

입력
2010.08.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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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올림픽이 끝나면 양심수의 대폭적인 석방이 있을 거고, 나도 당연히 석방될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고 개천절 특사가 있긴 했으나 나를 포함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또 다시 석방에서 제외됐다. 특히 나의 경우 석방예상자 명단에도 들어 있어 꼭 석방될 것으로 생각됐으나 석방되지 못했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나는 비교적 징역생활을 편하게 하고 또 이번에 석방되지 못하더라도 가까운 시일 안에 석방될 게 틀림없는데도 이렇게나 마음이 아픈데 이번에 석방되지 않으면 언제 석방될지 알 수 없는 장기수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 평상시라면 체념하고 징역을 살겠지만 언필칭 민주시대가 도래한 데다 걸핏하면 대폭적인 석방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니 석방을 기대하지 않을 정치범은 없었다. 특히 이번에는 인종과 종교,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자’는 ‘화합’의 올림픽을 치른 뒤고, 또 그것도 성공적으로 치른 뒤라 장기수들도 당연히 석방될 것으로 기대됐고, 또 석방돼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석방되지 못했으니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양심수 석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했다. 특히 개천절 특사 때 석방된 김문수가 열변으로 정치범 석방을 촉구해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는 말도 들렸다. 그리고 조영래가 한겨레신문에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라는 제목으로 나의 미석방을 규탄하는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을 본 교도관들이 나에게 와서 ‘글을 참 잘 썼더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아무튼 1988년이 가기 전에 소위 시국사범으로 불리는 일반 정치범은 전원 석방될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장기수들이 석방될 가능성이 희박한 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기수를 포함해 정치범을 전원 석방하지 않으면 석방을 거부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현실성이 없을 것 같아 그만뒀다. 그 대신 석방된 뒤 정치범의 전원 석방을 촉구하는 투쟁을 전개할 생각으로 아내에게 전한 쪽지글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라고 부탁했다.

1988년 12월 21일. 마침내 나를 포함해 소위 시국사범에 해당하는 정치범은 전원 석방됐다. 석방이 어려울 수도 있은 부산미문화원사건의 문부식, 남민전사건의 김남주, 안재구, 차성환 등도 이때 석방됐다. 그러나 서승을 비롯한 장기수들은 석방되지 못했다.

나는 석방 전날 석방통지를 받고서 재소자들과 직원들에게 두루 인사했는데, 재소자들의 섭섭해 하는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데도 무언가 자기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척 난감했다. 석방돼서도 문득문득 그들이 생각났으나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데다 일상적인 활동에 매몰돼 잊고 지낼 때도 많아 미안한 마음 그지없었다.

그런데 나는 재소자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범죄 없는 세상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고, 이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야 함을 절감했다. 어떤 경우에도 의식주와 의료 및 교육을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다면 생계형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절도, 강도, 사기, 횡령 등의 범죄도 현저히 줄겠기 때문이다.

공주교도소 정문을 나서니 계훈제, 이부영, 김근태, 박계동 등 환영인파가 교도소 앞마당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인사말에서 ‘민족이 분단돼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한 사람을 30년 넘게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사람의 짓이 못 된다. 이런 민족이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겠나? 아무 의미도 없는 전향 같은 것 이제 더 따지지 말고 무조건 석방해야 한다. 더욱이 공산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북한과도 온갖 대화와 교류를 하는 마당에 유독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비전향이란 이유로 감옥에 가둬두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수치다. 우리 함께 장기수의 전원 석방을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그러고는 환영 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장기수의 상징처럼 돼 있던 서승을 만나러 대전교도소로 갔다. 석방 당일 다른 정치범을 접견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교도소에서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우리들의 기세가 원체 등등한 데다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접견이 허락됐다. 함께 간 사람들과 서승을 만났는데, 대구교도소에서 헤어진 지 10년만이었다. 나는 전주교도소를 거쳐 석방되어 바깥에서 내 하고 싶은 대로 활동하다가 다시 구속돼 3년간 징역을 살고 또다시 석방됐는데도 그는 아직도 18년째 바깥세상 한번 못 보고 징역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지은 죄가 더 없는데도 말이다.

서승은 재일동포로서 조국에 유학 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재학 중 그의 동생 서준식과 함께 1971년 대통령 선거용인 ?瑛歐냔?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18년간 징역을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잔학상을 온전히 보여준 ‘조작간첩’의 표본이었다. 간첩으로 조작하려니 고문하게 됐고, 고문에 굴복해 간첩을 인정하느니 죽음을 택하려고 석유를 덮어쓰고 불을 붙여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간첩으로 조작되고 또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게 폭로될까 봐 석방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폭로돼 알 사람은 다 아는데도 말이다.

나는 1978년 대구교도소에서 6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냈는데, 그는 간첩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한마디로 성자와 같았다. 그가 덮어쓴 누명과 그가 당한 고통으로 보자면 그는 조국에 대한 배신감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원한, 그리고 인생에 대한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을 법한데도 그와는 정반대였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뜨거웠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하루하루 희망찬 삶을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와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장기수 석방을 위한 투쟁의지를 다지면서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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