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매일 먹는 ‘우리 밥’이 요즘처럼 화두였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수 년 전부터 명동 거리를 메우기 시작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국음식의 맛에 반하고, 김치며 구운 김이며 우리 식재료를 사간다. 세계적으로 와인이나 치즈 등 발효식품의 우수성이 강조되면서 재발견된 것이 또한 한국의 김치와 장이다. 뭉근히 시간을 두고 발효시킨 맛을 이렇게 저렇게 손으로 버무려 만든 우리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골퍼들의 만찬메뉴로, 유럽의 미식가들이 둘러앉은 파티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면서 다른 문화권의 식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장인정신
“주방에서 자주 울었던 기억이 많아요. 계란 몇 판을 모두 풀어 부친 지단도 한번 트집 잡히면 모두 버려지곤 했답니다.”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메이필드호텔 전통 한정식 레스토랑 봉래헌(02-2660-9020)을 진두지휘하는 이금희 조리장은 한정식 주방에 첫 발을 내딛던 옛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충남 서산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이 조리장은 조리학과 재학시절, 닭을 잡는 실습이 고역으로 느껴지던 얌전한 여학생이었다고. 이 조리장이 취업을 하던 즈음이 바로 아시안 게임을 막 지낸 후였고, 특급호텔 인사부에서 조리학과 학생들을 스카우트하러 다닐 정도로 당시 외식업은 호황이었다. 그렇게 행운처럼 발을 들인 한 특급호텔의 양식당 주방에서 입사 단 몇 달 만에 큰 결심을 세운다.
“양식당에서 여자 요리사가 불 한번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게다가 제 스스로 즐기는 요리, 더 맛있다고 느끼는 요리가 한식이었으니 망설임의 여지없이 한식부로 옮길 수 있었지요.”
한정식에 한 획을 그어보리라 다짐을 하고 옮겨간 한식 주방은 그러나 녹록하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주방에는 ‘여사님’들이라 부르던 손맛 좋은 찬모분들이 여럿 계셨는데 대개 요정이라 불리던 요릿집 문화의 마지막 세대들이셨다. 그 분들의 손맛을 이어받는 대신 혹독한 시집살이가 뒤따랐다. 하루 종일 반찬만 옮겨 담느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혔던 기억, 식혜를 담그며 설탕을 빼먹는 바람에 밥알이 뜨지 않아 혼났던 기억들은 이금희 조리장의 손맛으로 마디마디 남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사님들이 저를 많이 봐주셨던 거였어요.” 20여년이 훌쩍 지나 특급호텔의 한식 주방을 지휘하는 수장이 되어 돌이켜 보니 모두가 아련한 추억이다. “요즘은 그 당시처럼 엄하게 주방을 다룰 수 없어요. 한식 요리사를 자처하는 학생들도 많이 없을뿐더러 발을 들였다가도 조금만 고되다 싶으면 바로 떠나갑니다.” 후배 양성의 의욕이 넘치는 이금희 조리장은 현장을 견뎌낼 각오가 없는 학생들, 출세욕이 앞서는 학생들은 절대로 손맛 전승의 과정을 이겨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장인정신이 필요한 거죠. 그래야 일련의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매일 잔치를 치르러 주방에 오는 기분으로 출근한다는 이 조리장은 그러나 막상 주방문을 여는 순간 온 신경이 예민해진다고.
“매일 매일 남의 잔치를 차리는 것이 한정식을 하는 제 업인 것이고, 제가 조그만 실수를 만들면 남의 잔치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 없죠.”
다른 이의 한끼 한끼를 잔치처럼 차려주고픈 엄마마음과 즐기는 마음의 완벽주의 장인정신이 봉래헌 음식 맛의 비결이었다.
우리 밥의 참맛
가리는 음식이 따로 없지만 특히 나물을 즐겨 먹는다는 이금희 조리장은 좋은 재료를 써서 삼삼하게 무쳐낸 나물 이야기를 하면 침이 고인다 말한다. “요즘 가지가 맛있으니까 기름에 살짝 볶아 간을 하고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딱 한 방울 넣어 마무리하면 아주 맛있지요. 아, 깨를 반 정도만 갈아서 넣으면 훨씬 진한 고소함을 더할 수 있답니다.”
조리장이 특히 좋아하는 맛이어서일까. 봉래헌에서는 곁들임 반찬 중에 특히 나물을 더 달라고 요청하는 손님들이 많은 편이다. 또한 우리 콩으로 직접 담근 된장, 직접 짜서 쓰는 참기름 등이 한 겹, 한 겹 더해져 맛을 이루니 그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 그 마저도 본 재료의 맛을 살려줄 만큼만, 딱 고만큼만 넣는 것이 이 조리장의 레시피다.
식재료는 청과상에서 배달해 주는 대로 받아쓰지 않고 직원들이 직접 나가 시장을 보고 사입을 한다. 직원들은 고달프지만 손님들은 즐겁다. 예산 농장에서 올라오는 무, 배추, 감자, 버섯은 연중 소비된다. 이렇게 재료 자체에 공을 들이다보니 아까워서라도 양념으로 뒤덮어 버리는 일은 할 수가 없겠지 싶다. 아니, 양념으로 뒤덮은 요리를 할 필요가 없겠지 싶다. 식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요리는 지금 전세계적으로 환영받는 추세다. 자연과 호흡을 같이 하는 제철 재료, 순한 땅에서 길러낸 유기농 채소 등이 환영받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이금희 조리장의 한정식은 이미 세계인의 입맛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들른 외국인 손님이 병어조림을 가시만 남긴 채 그릇을 싹 비우? 전통혼례에 참석했던 단체 손님들은 봉래헌의 음식으로 편안한 속을 안고 돌아간다. 이금희 조리장은 매일 매일이 잔치다.
박재은 푸드칼럼니스트 eatgamsa@gmail.com
사진=임우석 imwoo5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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