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중순 독일 볼프스부르크시(市)에 있는 폴크스바겐 본사 회장실 책상엔 200쪽 분량의 두툼한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주제는 한국의 자동차산업 현황. 마틴 빈터콘 회장은 보고서를 읽고 직접 현대차의 i20을 시승해 보았다. 그는 이어 본사 주요 임원들에게 보고서 숙독을 지시하고 현대ㆍ기아차의 상승세에 대한 대책도 주문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지난 25일(현지시간) 폴크스바겐 본사 3층 임원 회의실. 올 들어 처음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마틴 빈터콘 회장은 시종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는 “북미 시장에 현지 전략형 중형차를 투입, 2018년 세계 1위 업체가 될 것”이라며 자사의 ‘글로벌 넘버 원 전략’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현대ㆍ기아차에 대해 “매우 매우 강력한(very very serious) 경쟁 상대”라며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최근 북미, 중국, 러시아 등에서 어떤 업체가 제일 많이 성장했느냐”고 반문한 뒤 “바로 현대ㆍ기아차”라며 “그들은 품질 면에서 세계적 수준에 근접한 차를 만들 뿐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차를 만들 줄도 안다”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사실 폴크스바겐이 글로벌 넘버 원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3월부터다. 부동의 1위였던 GM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파산 위기로 몰린 것. 하지만 이때만 해도 주요 라이벌은 일본의 도요타였고, 현대ㆍ기아차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올초 도요타의 대량 리콜사태로 상황은 급변했다. 특히, 도요타 사태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 경영 등 구조적 문제로 발생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폴크스바겐은 다음 경쟁상대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현대ㆍ기아차가 지목된 것.
실제로 현대ㆍ기아차는 2006년 글로벌 판매량이 375만대에서 지난 해 478만대로 100만대 이상 폭증해 글로벌 카메이커 가운데 가장 많이 늘었다. 같은 기간 판매 증가 2위는 폴크스바겐(50만대)이었다. 더욱이 올해 현대ㆍ기아차는 550만대(상반기 275만대 판매)가 예상되고 이르면 내년엔 600만대 돌파도 가능할 전망이다. 또 올 상반기 현대ㆍ기아차는 폴크스바겐의 안방 격인 유럽에서 도요타를 제쳤다. 폴크스바겐으로서는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폴크스바겐도 한층 공세적인 전략을 택했다. 현대ㆍ기아차와 1, 2위를 다투고 있는 중국 시장에서는 증산에 나선 것. 기존 3개 공장 외에 30만대 생산 규모 공장 2곳을 새로 건설할 예정이다. 현대ㆍ 기아차는 아직 중국에 제 3공장 착공도 하지 못한 상태다.
폴크스바겐은 특히 그 동안 현대ㆍ기아차에 비해 약세였던 북미 지역에서 신차를 투입, 파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할 예정이다. 마틴 빈터콘 회장은 “한달 전부터는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한 제타를 2만달러 미만에 출시하고 있으며, 2011년께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북미 전략형 차종을 현지 공장(테네시주 차타누가)에서 생산,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폴크스바겐은 10월께 북미시장에 선보일 현대차의 에쿠스에 맞서 뉴 페이톤을 투입할 것으로 보인다. 마틴 빈터콘 회장은 “중국에서 출시한 뉴 페이톤을 9월 한국에 선보인 뒤 미국 시장 진출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폴크스바겐이 세계 1위가 되기 위해서는 신흥시장과 선진 시장에서 현대ㆍ기아차와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한 셈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두 회사 간 대결은 현대ㆍ기아차가 670~680만대 생산이 가능한 3~5년 뒤 본격화할 것”이라면서도 “상대방의 장점인 기술력(폴크스바겐)과 과감한 마케팅 능력(현대ㆍ기아차)을 얼마나 배우고 따라 잡느냐가 앞으로 승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볼프스부르크(독일)=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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