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연재를 의뢰받았을 때 저는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벌써 회고록을 쓸 나이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되물었더니, 이 연재물 원고 청탁자인 한국일보 장병욱 기자는 “그냥 있는 솜씨에 자유롭게 써 주시죠” 그러는 것입니다. 있는 솜씨라니? 제가 신문 연재 칼럼을 쓸 정도로 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인데, 사실 장병욱 연극전문 기자는 언제부터인가 제가 연출한 연극을 보러 오지 않습니다. 대신 젊은 연출가의 작품이나 차라리 무명의 지역극단 작품을 보고 리뷰를 씁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연극 전문기자의 이런 입장과 태도를 존중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중견(中堅)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시인 박남철의 말마따나 잘못하면 중견(中犬) 대접을 받으면서 천덕꾸러기로 밀려나기 십상이지요. 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자들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저는 나이 쉰 아홉이 되도록 쉬지 않고 연극작업을 해 왔습니다. 그 동안 저를 가열차게 밀어 부친 에너지는 명성보다 더욱 절박한 생존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명성이란 것이 있었고, 저의 작업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제가 부패하고 있는 것이지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부패한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는 그렇게 말합니다. 예술가에게 본질을 지키는 일은 생명처럼 귀중합니다. 나이가 들고 명성이 쌓일수록 비본질적인 시간들이 늘어납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일수록 달콤하고 허세를 부리기 마련이지요. 허세가 명성을 갉아먹고 급기야 인간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박수 쳐줄 때 떠나는 것이 상책이지요.
저는 이미 지난해부터 스스로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해 왔습니다. 김해군 생림면 도요마을에 생애 처음으로 평당 22만원을 주고 땅 600평을 샀습니다. 도요마을은 오던 비도 산이 높아 되돌아 간다는 끝마을 입니다. 등산 코스로 유명한 무척산을 등지고 있는 강변 마을인데 바로 곁에 낙동강 취수장이 있어 돼지도 키우지 못하는 청정지역이지요. 여기에 10년 이상 저와 함께 작업해 온 연희단거리패 단원들 집을 직접 저희 손으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각 집마다 문패를 달았습니다. 저희 집에는 그럴듯하게 ‘이윤택가(李潤澤 家)’라고 큼지막한 나무 문패를 달았고, 거실을 루마니아 ‘햄릿’공연 때 눈 여겨 보았던 집시풍 가옥구조로 널찍하게 꾸몄습니다. 여기서 단원들과 회의도 하고 놀기도 합니다. ‘소희와 철영이네’는 연희단거리패 대표 김소희씨와 남동생 김철영군의 집 문패입니다.두 오누이는 연극배우입니다. ‘정명이네’는 가마골소극장 대표 이윤주(배우,연출가)와 조인곤(조명감독) 부부의 집입니다. 정명이는 두 연극인 부부의 딸인데, 제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김경수 박현철 남미정 김미숙 이승헌 최영… 저와 동고동락해 온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문패가 걸렸습니다. 최근에 또 한 쌍의 단원 부부가 입주했습니다. 연극배우 변진호 홍선주 신혼부부의 집도 마련되었습니다.
“자, 이제 여기 살면서 마음 편하게 연극작업을 하자. 내가 죽거든 우리 집 거실이 바로 기념관이 된다. 나는 저 거실 옆 작은 방 나무 침대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면 거실에 컴퓨터 한 대 들여 놓고 나와 관련된 자료를 입력해라. 그러면 찾아 온 사람들이 자유롭게 열람을 하고, 내 영혼과 함께 지낼 것이다. 유언은 미리 간단하게 영어로 남긴다. ‘Go on-’ 번역하면 ‘계속 해라-’….
말이 씨가 되었는지, 이 연재원고 25회분을 쓸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밀양연극촌에서 일을 하고 도요로 차를 몰고 오던 도중, 내 SOUL이 산허리를 들이박고 180도 거꾸로 뒤집어져 구겨 박혀버린 것입니다.
시골생활을 하려면 직접 차를 몰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환갑을 바라 보는 나이에 운전 면허를 따고, 작지만 희고 예쁜 차를 구입했습니다. 작가회의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여류 시인이 정차되어 있는 희고 작은 SOUL을 보고 문득 이윤택의 차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만큼 나의 SOUL은 내 영혼이 깃든 차였습니다.
그날 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땡볕 속을 가로질러 달리던 내 SOUL은 숨이 찼던지 길가로 미끄러졌고, 저는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그만 액셀레이터를 급하게 밟아서 차가 산허리를 치고 올라 공중으로 붕 떠서 거꾸로 박힌 것이지요.
그 와중에서도 저의 의식은 깨어 있었습니다. “아하, 이거 어쩌지” 그러면서 차는 뒤집어졌고, 저는 상당히 불쾌한 심정으로 “젠장,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면서 죽어갈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내 몸은 온전했습니다. 머리통이 거꾸로 박혔는데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손도 움직일 수 있어서 속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거꾸로 박힌 내 모습이 망측해서 어떻게든 문을 밀어내고 기어 나가려 했습니다. 신기하게 구겨진 문짝이 밀렸고, 저는 개구멍 빠져나가듯 기어 나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사지가 멀쩡했습니다. 남이 볼까 창피하기도 해서 길을 건너 가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있으니 단원들이 왔습니다. 어이없어 하는 단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저거 사진 한 장 찍어 놓아라. 내 영혼이 구겨 박혔다.”
그 이후로 저는 아주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이 연재원고도 무사하게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삶이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슨 명성이나 재물을 기대하면서 연극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연극도 결국 삶의 한 선택일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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