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경찰의 무리한 작전이 수도 마닐라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직 경찰관의 홍콩관광객 인질사건을 참극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범인이 돈이 아니라 단지 복직시켜달라고 요구해 회유가 가능했던 점, 애초 범인은 인질들을 해칠 의도가 적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 경찰이 보다 지혜롭게 대응했더라면 충분히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홍콩 행정수반인 도널드 창(曾蔭權) 행정장관은 23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매우 유감스럽다"며 "사건이 다뤄진 방식과 결과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창 행정장관은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의 전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며 필리핀 당국에 사건 전모의 정보 제공을 요구했다. 양제츠(杨洁篪) 중국 외교부장도 당일 밤 알베르토 로물로 필리핀 외무장관과 전화통화에서 유감을 표시하고 최대한 빨리 자세한 경위를 통보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사건을 1면 톱기사로 전한 홍콩 언론들은 필리핀 경찰의 무능함을 질타했다. 명보(明報)는 '필리핀 경찰의 무능함이 훙타이(康泰)여행사의 관광객 8명을 숨지게 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인질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제압작전을 펼치다 다수 희생자를 냈다"고 비난했다. 남편과 두 딸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난 렁모씨는 "범인은 처음에는 우리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면서 "필리핀 경찰과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를 쐈다"고 말했다.
실제 CNN방송 등에 따르면 범인 멘도사는 23일 오전 10시 인질극을 시작했으나, 오후 2~3시까지는 인질들을 위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직업을 돌려달라"는 요구사항을 써 놓은 뒤에는 인질들에게 음식을 공급받고, 9명을 놓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데드라인으로 제시한 오후3시까지 복직 협상에 진척이 없자 괴성을 지르는 등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후 8시께 차 안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경찰특공대가 최루탄을 쏜 뒤 버스 창문을 깨고 진압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 15명 중 8명이 사망했고, 멘도사는 경찰 저격수에게 사살 당했다.
멘도사는 17차례나 상을 받고 1986년 당시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비자금 해외 반출 시도를 좌절시킨 유능한 경찰이었으나 지난해 금품 갈취 혐의로 파면됐다. 멘도사는 범행 당시 M16 소총을 들고 있었지만 경찰복 차림이어서 관광버스가 "정지하라"는 그의 신호에 멈춰 문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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