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광해군 11) 1월 9일 평안도 순안어사(巡按御使) 이창정(李昌庭)이 평양감사 박엽을 탄핵했다.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착취하고 죽였다는 죄목이다. 그러나 그는 즉각 해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장살(杖殺)된 사람은 5명뿐이고, 어사의 탄핵은 마귀의 글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사실을 날조해 살인죄를 용서해 달라고 왕에게 요구했다.
박엽이 중앙의 고관까지 멸시했기 때문에 승정원은 즉각 박엽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
“삼가 박엽이 스스로 해명한 상소를 보건대, 조정을 업신여기고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군부(君父)를 우롱한 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중략) 지금 박엽이 이미 어사의 탄핵을 받았으니, 그 자신은 바로 살인한 죄인입니다. 박엽은 위인이 사납고 잔혹해, 전에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는 매를 맞고 죽은 자가 즐비했으며, 성천(成川)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억울하게 죽은 자의 시체가 쌓였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을 찔러죽인 다음 그의 아내를 빼았고, 기생을 끼고서 기강을 어지럽히기까지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공론(公論)에 죄를 지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방백(方伯:도의 행정책임자)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대해 갑자기 잘못된 은혜를 내리시고, 대각의 탄핵하던 상소가 끝내 침묵으로 돌아가니, 이로 인해 박엽의 교만함과 포악함이 더욱 심해져 사람을 마구 죽여 그 해가 개와 고양이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중략) 지금이 어느 때인데 평안도의 중요한 지역을 저런 미친 애숭이에게 맡김으로써 한 도의 쇠잔한 백성으로 하여금 전부 시랑과 독사의 입 속의 고기가 되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광해군의 답변은 엉뚱했다. 지금 중전의 병이 심한데 이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번거롭게 한다며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러면 광해군은 왜 박엽을 비호한 것일까? 박엽은 행정능력도 있고, 유덕신(柳德新)이라는 광해군 처가 사람을 통해 광해군에게 접근했다. 박엽은 재주가 있고 중국어도 잘 했으므로 역관들과 친했다. 그래서 중국과 통상해 진기한 보물과 기이한 장신구를 많이 모았다. 명주(明珠)를 꿴 공작 깃털과 비단으로 만든 이불도 있었다. 박엽은 이러한 물건들을 왕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래서 광해군은 자나깨나 박엽을 잊지 못했다. 박엽은 평양 영내에서 지극히 사치스런 생활을 했으며, 8개의 방에 기생을 뽑아 채우고, 술과 음식과 의복에 드는 돈도 거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을 마구 착취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형별로 사람을 죽게까지 한 것이다. 조선시대 권력형 비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엽은 왕권을 배경으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중앙의 재상도, 암행어사도 겁날 것이 없었다. 평안감사 박엽은 왕과 유착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창정은 사실 당시의 권력자 이이첨(李爾瞻)의 배경을 가지고 현안 문제인 평양감사 박엽의 비리를 고발한 것인데 박엽은 그 보다 더 큰 왕권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안어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했다. 그러니 박엽은 한술 더 떠 순안어사 이창정에게 공문을 보내 알아서 처신하라고 협박을 했다. 그리고 도내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다. 이창정은 “신이 어사로서 박엽에게 업신여김을 당했고, 또 홍명원에게 무고를 입었으니, 체면을 이만저만 떨어뜨린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본도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니 조정에서 처치하소서”라고 치계(馳啓)했다. 이에 대해 광해군은 “이창정이 양식을 옮기는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감히 궁궐의 역사를 중지해야 된다고 아뢰니, 직언(直言)의 명예를 노리는 꼴이 매우 가증스럽다”고 했다. 이창정이 분호조참의로서 호남에 있으면서 민생이 매우 곤란하니 궁궐 신축을 중지하라고 상소했던 것을 트집을 잡은 것이다.
결국 이 사안은 흐지부지되고 다른 일을 가지고 이창정은 추고(推考: 심문)을 받는 선에서 끝났다. 오늘날의 권력형 비리 척결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이라 생각되어 소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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