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 체결한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대교린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 국제법 질서로 들어서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푸른역사 발행)는 이 강화도조약의 조선측 협상책임자였던 신헌(申櫶ㆍ1811~1884)이 조약 체결을 전후한 한 달 간에 벌어진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쓴 기록을 처음으로 완역한 것이다. ‘심(沁)’은 예로부터 강화도를 이르는 별칭이었으니 심행일기는 ‘강화 행차의 일기’라는 뜻이다.
신헌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개화론자인 박규수의 천거로 강화도조약의 협상책임자로 임명됐으나 김정희와 인척관계인 척화론자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고 있기도 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양국의 교린 관계를 서구 근대의 외교 형태로 개편하려는 일본 측의 요구를 둘러싸고 서계(書契ㆍ외교문서) 문제가 1868년부터 현안이었다. 또 1875년에는 강화도에서 벌어진 운요호(雲揚號) 사건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일본측은 당초 이 두 현안을 빌미로 사절단을 보냈으나 협상 이틀째 느닷없이 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 귀국과 옛 우호를 중수하게 되었으니 실로 양국의 다행이다. 초록한 조약 13개 항목을 상세히 살펴보고 임금께 아뢰어 품처(稟處)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조약은 무슨 사안인가”
“귀국 지방에 개관(開館)해서 함께 통상하자는 것이다.”
“300년 동안 통상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그런데 지금 갑자기 따로 요청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천하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며, 일본도 각국에 이미 공관을 많이 열었다.”
“지금 이 개관과 통상에 관한 논의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요, 우리 백성들이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인데 이러한 큰 일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허락할 수 있겠는가?”
신헌은 당시 접견단의 행적, 일본측과의 협상기록, 접수한 공문, 보고문, 상소문 등을 이처럼 그대로 기록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협상에서 조약문에 임금의 이름을 넣느냐가 큰 논란거리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일본측은 조약문에 고종의 어보(御寶ㆍ임금의 도장)를 찍고 이름도 써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선측은 어보만 찍을 것을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일본측에 양보했다.
번역자인 이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은 “지금까지 강화도조약 연구는 주로 일본측의 기록을 토대로 연구됐으나 완역된 를 통해 조선의 입장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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