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도처가 무덥나이다. 어제는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였지만 여름이란 작자는 도대체 염치를 모르나이다. 옛사람들이 전하기를 처서엔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 하였지만 모기 입도 오랫동안 제 자리에 튼튼하게 붙어있을 것 같나이다. 그 입으로 땀에 젖은 서민의 고혈을 빨아들일 것 같나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무더위가 9월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일기예보는 전하의 제국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이니 엄하게 다스리소서. 이번 주에 비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예보는 전하의 국궁 화살이 정중앙에 딱 소리를 내듯이 적중하기를 청하나이다.
그 비가 밤에도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의 열기를 식혀주기를 원하나이다. 전하, 더운 바람을 뿜어내는 선풍기는 봄, 가을용이지 더 이상 서민의 여름용 가전제품이 아니니 판매를 금하게 하소서. 길 위의 모든 자동차마다 에어컨을 켜고 굴러가나이다. 낮에는 고층건물에 빼곡한 사무실마다 문을 꼭꼭 닫고 에어컨을 돌리나이다.
대단지 아파트를 보면 더욱 끔찍하나이다. 수천 가구, 수만 가구가 같은 시간에 에어컨을 핑핑 돌리나이다. 이 나라 여름이란 역적은 계절의 탈을 쓰고 전력이란 뇌물을 받아먹고 사는 불가사리이나이다. 당장 추포를 명하여 천 길 만 길 땅속에 가두시고 유배 중인 가을 공을 속히 불러 전하의 제국에 '추정(秋情)'을 베푸소서. 전하.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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