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양혜규(39)씨는 최근 1년간 언론에 가장 자주 이름이 호명된 미술작가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돼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작품이 소장되고, 한국 작가로 유일하게 바젤아트페어 특별전에 참여하고, 김세중청년조각상을 수상하는 등 그와 관련된 뉴스가 줄줄이 이어졌다.
대중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2006년의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는 인천의 폐가에서 열려 접근이 쉽지 않았다. 20일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 ‘셋을 위한 목소리’는 양씨가 국내 미술전시장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다. 국제적 작가로 성장한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블라인드를 활용한 설치작품, 바퀴가 달린 이동식 행거와 전구를 활용한 광원(光源)조각작품 등 그의 대표작들을 비롯해 사진, 영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난 10여년의 흔적이 두루 소개된다.
삼각형 모양의 벽체로 공간이 나뉘어진 2층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6점으로 구성된 광원조각 시리즈 ‘서울근성’이다. 형형색색의 핸드폰 액세서리로 몸을 치장한 ‘서울 멋쟁이’, 약통과 마사지 기구 등 일상 속 의료용품으로 뒤덮인 ‘약장수’, 온갖 청소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씻고 닦고’ 등에서 16년 전 대학(서울대 조소과) 졸업 후 서울을 떠난 작가의 눈에 비친 2010년 서울의 표정과 욕망이 읽힌다.
이밖에도 베니스비엔날레 때 선보인 영상작품 ‘쌍과 반쪽_이름없는 이웃들과의 사건들’, 양씨가 독일에서 사용하는 1㎏짜리 소금상자와 소금으로 구성한 설치작품 ‘소금기 도는 노을’, 동네에 놓인 평상을 소재로 한 사진 ‘평상의 사회적 조건’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장에 나왔다.
전시장 3층은 조명과 블라인드를 이용한 작업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시리즈인 ‘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이동식 조명이 블라인드와 거울 사이를 통과하며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는 가운데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 히터에서 나오는 열, 그리고 향 분사기에서 나오는 여러 냄새들이 관람객들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관람객들의 목소리. 한 쪽에 설치된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면 거기 맞춰 조명이 움직인다. 양씨는 “목소리나 냄새는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추상적이어서 말로 묘사하기 어렵다.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감각들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전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름이다. 양씨는 뒤라스의 단편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을 모노드라마로 만들어 9월 11, 12일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린다. 양씨가 각본, 연출을 맡았고 아나운서 출신인 유정아씨가 출연한다. 또 아트선재센터 지하의 씨네코드 선재에서는 뒤라스가 감독한 영화 5편을 상영한다. 양씨는 뒤라스에 대해 “장르는 다르지만 공감대를 느낀다”면서 “뒤라스는 물체에 비유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의 작가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설명에 대한 요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지시적으로 풀지 않았다”고 말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그가 처음 읽었던 뒤라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양씨의 작품들은 보고 난 다음에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감각으로 느껴야 하는 전시다. 그래도 조금 더 그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가고 싶다면 그의 작품세계를 담은 책 (현실문화 발행)가 참고가 될 듯하다. 이번 전시의 예고편 격으로 지난해 출간된 책으로, 양씨를 비롯해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주은지씨, MoMA 큐레이터 정도련씨 등이 글을 썼다.
베니스비엔날레 이후 뭐가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양씨는 “이름 앞에 ‘베니스비엔날레 작가’라는 수식어가 생긴 게 전부”라며 “기쁜 소식이 있어도 딱 5분만 좋아하고 잊어버린다. 너무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는 내년에 오스트리아 브레겐츠미술관, 영국 옥스포드미술관, 미국 아스펜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10월 24일까지. (02)733-8945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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