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石泉) 신작(申綽, 1760-1828)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2년 차이의 동년배로 다산이 귀양에서 돌아온 말년에 두물 머리[兩水]에서 이웃으로 지기(知己)로 교유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옛날 광주(廣州) 마현리[마재]로, 천마산을 배경으로 남ㆍ북 한강과 초내[苕川]가 합류하는 경승이다. 다산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이며, 석천은 강화도에서 정제두(鄭齊斗)의 강화학(江華學)을 이은 그 사위 신대우(申大羽)의 아들로, 50살 때 광주 사촌(社村)으로 이사하여 선영(先塋)을 지키며 크게 이룬 경학자(經學者)였다.
마침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반생의 원고뭉치를) 안고 온 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다(抱歸三年 無人共讀)”고 읊은 때 석천과 만나,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후기 한강의 문명을 함께 이루어 갔던 모습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속세의 생활 반평생에 바라는 것 없으나
유독 맑고 그윽한 그대의 거처를 좋아하네.
집에 전하는 옛 사업은 천 권의 경서이고
늘그막의 생애는 한 언덕의 보리밭일세.
짙은 그늘 꽃다운 나무엔 지나는 새를 보겠고
고요한 푸른 못에는 고기 노는 걸 알겠네.
아무 일 없이 흉금을 헤치고 서로 마주하니
저 강호에 둥둥 뜬 배와 서로 같네.
[半世塵寰無所求 喜君居止獨淸幽 傳家舊業經千卷 晩境生涯麥一邱
芳樹陰濃看鳥過 碧潭風靜識魚游 披襟共對虛無事 等是江湖泛泛舟][정약용,『다산시문집』 제7권,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다산의 이 시집에는 두 사람의 사귐의 모습들을 전해 주는데, 사촌은 지금의 초월읍 서하리(西霞里)로, 이곳 사마루 마을의 석천의 서재에는 4,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천권의 경서”라고 한 석천의 가학(家學)은 이른바 강화학으로, 그의 경학은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신석천과 정다산을 경학자[經師]와 경세가로 지목하여 그 학문적 지향을 함께 말한 뜻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사귐은 학문과 우의로 두 가문의 세교(世交)로 이어졌고, 세교로 이어진 정경은 석천의 아들 명연(命淵)이 다산을 따라 수종사(水鐘寺)를 유람하고 강 건너 천진암에 이르러 차운한 시에, “좋은 때에 어른들을 시종하여 조용한 놀음으로 운림(雲林)을 찾았다”고 한 글(《의유당전서》1 )에서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런 한강의 문화환경이 난개발 속에 크게 훼손되고 있다. 근기(近畿) 실학과 양근(陽根)의 서학(西學)과 여주ㆍ광주의 문학이며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실학 전통은 조선 후기의 학문과 문예와 사상의 한 중심이었다. 이 두물 머리 문화권의 문화와 사상을 뛰어난 자연 경관과 함께 총체적으로 보존 연구 발전시킬 한강 문화유산 특별계획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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