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악양 평사리에 마련된 문인집필실에 와서 무거운 가방을 풀었습니다. 지리산을 이고 섬진강을 베고 누운 여기도 아직 여름은 뜨겁게 머물고 있지만, 해 지면 불어오는 산바람 강바람과 서늘해지며 깊어지는 적요한 밤에는 멀리서 가을이 입고 오는 스란치마 끌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문인집필실이라 해서 글만 쓰는 곳은 아닙니다. 누구는 무엇인가 쓰기 위해 찾아오고 또 누군가는 바쁜 일상에 시달리다 외로워지기 위해 찾아옵니다. 여기 와서 먼저 선승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던 부산의 소설가 강동수 형을 만난 것은 내게는 행운이었고, 다음 소설 원고에 시달리는 그에게 나는 불청객이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좋은 소설 의 출판기념을 축하하는 시인과 소설가의 밤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 술이 떨어지자 끝이 났습니다.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대숲에 새벽안개가 밀리는 소리에 깨어 평사리 고샅길을 한 바퀴 돌다 낮은 돌담 위에 활짝 핀 노란 수세미꽃을 보았습니다.
초가지붕 위에 살짝 앉은 조롱박을 만났습니다. 대숲 사이 숨은 듯 핀 상사화 한 송이 앞에서는 오래 서 있었습니다. 한 줄기에서 잎 지고 나면 꽃이 피어 상사(相思)란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꽃이며, 누구의 잎입니까. 다시 무거워지는 생각에 동쪽에 혼자 두고 온 당신을 생각합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